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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던 고3 시기, 저에게는 한 명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재치있었고 공부도 잘했고 이런저런 재능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할 하지 못하는 어둠이 있었어요. 친구의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다투곤 했는데 그 시기에는 그 정도가 더 심각했지요.

 

친구는 몸도 자주 아프다고 등, 허리, 어깨가 뭉친다고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의 고통을 이야기하지 못할 때 몸에 나타나는 ‘신체화’ 증상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었지요. 언젠가부터 자신의 마음 속 이야기를 저에게 풀어놓기 시작했어요. 저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며 울면서 분노하며 이야기했지요.

 

처음에는 친구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열심히 들어주었습니다. 그 때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3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서서 밥을 먹고, 점심시간에도 공부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운동장 몇 바퀴를 도는 것이 하루 중 할 수 있는 휴식이자 운동의 전부였는데, 그렇게 운동장을 함께 도는 시간이 그 친구가 저에게 마음의 어둠을 털어놓는 시간이었지요.

 

친구의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주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에는 부부싸움이 너무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발전했습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무력과 슬픔, 분노의 잔상이 마음에 너무 오래 남아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아픈 말을 듣는 것이 점점 쉽지 않다고만 느꼈을 뿐, 저도 아프기 시작하다는 것을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했어요. 게다가 친구는 한번 얘기를 하기 시작하자, 기회만 있으면 저에게 얘기를 하고 싶어 했지요.그 때 저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견딜 내면의 힘과 마음의 여유 그리고 그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시간과 범위의 안정된 틀이 없었는데도 말이지요.

 

말을 들어주는 것은 귀와 가슴만 내어준다면 쉽게 할 수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친구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고 그런 버거운 마음조차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어요. 소통에 서툴렀고 제 마음도 잘 몰랐으니까요. 결국 친구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못하게 되었고 친구는 어렵게 꺼낸 아픈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저를 원망하고 비난하기에 이르게 되었지요.

 

타인 공감이 아닌 자기 공감의 자리로

 

상담자가 되기 전에도, 그리고 되고난 이후에도 이따금씩 친구와 함께 돌던 운동장, 누군가의 어둠을 받아안게 된 그 시간을 다시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고통을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어 흘러넘치는 말을, 그 말을 누군가에게든 해야 했던 친구의 목소리와 표정이 여전히 저에게 생생합니다.

 

그 때 친구에게는 분명 공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필요한 공감을 해주지 못핸던 저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휩싸여있었지요. 그렇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고 오히려 무감해지려 애쓰기도 했던 제가 상담자가 될 수 있을지, 상담자가 되기 전에는 의혹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또 그렇기에) 공감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 상담자가 되었고 그러면서 알게 되었지요. 그 때 친구에게 공감이 필요했던 만큼이나 저에게도 공감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 때 그 말들을 받아내며 제가 마음으로 느껴야 했던 무거움과 버거움은 어쩌면 친구의 것이 아닌 저의 것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미 제 안에 있던 어떤 마음들이 친구의 말들로 인해 생생하게 살아났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들으면서도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공감을 해낼 능력이 없는 상태였지요.

또 공감은 단지 마음을 쓰는 것, 의지를 가지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훈련과 기술, 연습이 필요한 것이고, 단지 공감을 받는 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주는 자에게도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도 결국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감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지요.

 

모든 공감은 '자기공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점도 되지 않았던 작은 우리가 이 만큼 커올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의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고, 성장하는 동안 감당해야 했던 성장통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도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감의 세례와 바통을 주고 받으며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견뎌주고 버텨주는 사회 속의 나와 내 안의 사회를 실감합니다. 이 실감이 우리를 지금 여기에서 생생하게 살게 도와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를 외롭고 괴롭게 만드는 삶의 고통 속에 있다고 해도 끝끝내 버텨나갈 수 있는 이유도 공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감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공감하고 싶어도 그 마음을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순간들 역시 많습니다. 그때에는 서로에게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애써 공감하려 하거나, 아직 공감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서둘러 공감을 표현해버리기 보다는 침묵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타인을 위한 공감의 출발선은 언제나 자기 공감에 있기 때문이지요.

공감되지 않을 때에는 애써서 억지로 뭔가를 해내려 하기보다는 그 할 수 없음을 느끼는 ‘자기 공감’의 자리로 돌아가 그 마음을 충분히 느끼고 제대로 표현하는 것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타인으로부터 단절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더 잘 연결되기 위한 출발선이지요.우리는 내가 나와 연결되는 그 만큼 타인과 제대로 연결될 수 있으니까요.

 

공감하지 못하는 마음도 공감합니다.

 

공감하지 못했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친구의 어두운 마음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과거의 저 자신을 이렇게 뒤늦게 공감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저에게, 누군가의 어둠을 듣고 그 어둠에 압도되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하던 과거의 제 마음에 이야기해줍니다.

‘공감하는 자리에 애초에 네가 세워진 것 자체가 어렵고 불가능한 과제를 떠안는 것이었다’고.그리고 ‘공감하기가 어려울 때에는 말을 돌리려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기보다는 어려운 그 마음을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해보라’고 조언도 해봅니다. ‘내가 너를 돕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 얘기를 더 잘 들어주고 나눠줄 수 있는 어른을 찾아보자’고 친구의 손을 잡고 얘기를 해라고도 말해봅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것은 공감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삶의 선물을 그대로 보여주는 속담입니다. 그 선물을 잘 주고 받기 위해 공감의 출발선을 다시 세워봅니다.

우리는 모두 공감을 필요로 하지만 공감은 쉽지 않습니다. 공감이 어려울 때에는 누군가의 마음 곁에 가만히 서서 침묵해보는 것. 그 사람의 말이 주는 울림을, 그 사람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힘겨움을 그저 느낄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느껴보는 것부터 해보기로 합니다. '느낄 수 있을 만큼만'이요.

우리 모두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기로 합니다. 단정짓지 않기로 합니다. ‘공감하지 못했어도 괜찮다’, ‘아직 공감이 안 되어도 괜찮다’고 말 해봅니다. 그 마음까지 공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공감을 향해 매일 조금씩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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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05-24 15: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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