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영
[심리학 신문_The Psychology Times=임나영 ]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루에도 여러 건의 강력 범죄 사건이 뉴스에 보도된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가해자의 악랄함에 분노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피해자의 행실이 불량해서 범죄를 자초했다며 피해자를 비난하고 범죄 발생의 책임을 피해자에 돌린다. 하지만 범죄 사건의 본질을 파헤쳐 보면 범죄발생의 책임이 피해자에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범죄사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 할 수 있다. 2차 가해는 성범죄 등의 피해자에게 그 피해 사실을 근거로, 피해자를 모욕하거나 배척하는 행위를 말한다.
공정한 세상 가설
1966년 미국의 심리학자 멜빈 러너가 정립한 “공정한 세상 가설” 이란 어떤 사람에게 나쁜 일이나 불행한 상황이 발생하였을 때, 관찰자의 입장에서 ‘세상은 공정하고 공평한 곳이므로 관련 당사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그릇된 신념’을 말한다.
공정한 세상 가설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 세상이 선하며 공평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여기서 공정한 세상이란 인과응보가 이루어지는 세상 즉, 선한 행동에는 보상이 주어지며 악한 행동에는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대가가 나타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선 벌을 받는 것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 앞에 나타난 불쌍한 범죄 사건의 피해자는 이런 믿음을 손상시키기에 불안을 유발한다. 결국 이러한 불안을 해소하고 공정한 세상을 성립하기 위해선 피해자가 겪은 범죄 상황에 대해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이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짧은 바지를 입어서’, ‘늦은 시간에 돌아다녀서’ 등 만들어 낸 그럴 만한 이유에 본인은 해당하지 않으니 안도하게 된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선의 힘을 믿고 더욱 열심히 살아가며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추구한다. 그래서 흔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사람일수록 공정한 세상 가설에 빠져 2차 가해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일궈낸 아름답고 희망 찬 세상이 이유 없이 피해자에게 큰 불행을 안겨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지켜낸 ‘공정한 세상’이 정말로 공정한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2차 가해는 피해자를 위축시켜 범죄 사실을 신고하지 못하게 하고 가해자로 하여금 범죄의 무게를 낮추어 범죄 발생을 종용할 뿐이다. 무엇보다 내 마음의 불편함을 덜어내기 위해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가해의 일종이다.
세상에는 어쩌다 성공한 사람도 있고 노력해도 실패한 사람도 있다. 악한 행동을 일삼았지만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도 있고 평생을 선하게 살았지만 불행을 면치 못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만사는 철저한 공식과는 거리가 멀어서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따라서 범죄 사건 피해자를 향해 2차 가해를 가하는 것은 왜곡된 논리에 의한 것이며 일종의 인지적 편향임을 인지해야 한다.
성폭행 당할 만한, 괴롭힘 당할 만한, 살해 당할 만한 이유는 없다.
참고자료
서울경제신문 “피해자도 문제가…” 평범한 사람들이 2차 가해를 하는 어떤 이유
오디오 인문학 인간이해의 심리학 “공정한 세상 가설”
장진영 (2021) 성범죄 2차 피해 실태와 2차 가해 양상에 따른 방지책
정혜욱 (2018) 성폭력 범죄 2차 피해의 원인 및 방지책
최민지 (2020) [박원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의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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