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심리학 신문_The Psychology Times=김주희 ]
여자아이: “옛날에 여기서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나서 진짜 오랜만에 한번 와봤다...그랬는데?”
박두만: “그 아저씨 얼굴 봤어? 어떻게 생겼어?”
여자아이: "그냥 뭐, 뻔한 얼굴인데."
박두만: “어떻게?”
여자아이: “그냥...평범해요.”
출처: 영화 '살인의 추억' 스틸컷
‘이춘재 연쇄살인사건(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 엔딩 장면에서의 대화이다. 영화의 막바지 부분에서, 이제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닌 녹즙기 판매원이 된 박두만(송강호 扮)은 16년 전 한 여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던 배수로에 다시 찾아가게 되고, 그곳에서 한 여자아이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며칠 전에도 박두만처럼 배수로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는 것.
여자아이가 설명하는 그 남자는 ‘자기가 했던 일’, 즉 추억으로서 회상할 수 있는 ‘살인’이라는 행위가 생각나 또다시 배수로를 찾았을 것이다. 여자아이는 남자의 얼굴이 뻔하고 평범했다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듣게 된 박두만의 두 눈빛은 불안히 요동치다가, 마침내 카메라를 응시한다.
관객석을 향한 박두만의 강력한 시선, 무엇으로부터 발현되었으며, 또 누구를 향해가는 중인가?
이춘재의 연쇄살인범 유형과 연쇄행동에 대한 평가
순천향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오윤성 교수는 「현장에서의 연쇄행동 평가를 통한 범인심리 분석 및 행동 추정에 대한 연구,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2006)」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범인(이춘재)의 연쇄살인범 유형 및 연쇄행동 등에 대해 분석하였다.
우선 범인(이춘재)은 살인이라는 행위를 통한 성적인 만족을 얻는 사람으로서, 피해자의 목을 손이나 노끈 등을 이용해 살해하였으며, 일부 사체에 대해서는 송곳이나 칼 등을 이용해 상처를 내기도 했다. 극단적이고 가학적 폭력을 통해 성적 만족을 추구하면서도 당장의 목적 달성보다 자신의 안전을 우선시하며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에 따라 본 논문에서는 범인의 연쇄살인범 유형을 쾌락적 연쇄살인범 중 욕정/스릴형 연쇄살인범으로 추정하였다. 해당 유형의 경우 폭력과 성적인 만족 간의 결정적 관계가 있다.
범인이 선택한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지만 불특정다수로서 10대부터 70대 노파까지 그 연령이 다양했으며, 직업이나 신체적 특징은 고려되지 않았다. 범인은 잠재적 피해자 확보를 위해 시간과 장소를 사전에 선택하고 감시활동을 하다가 표적화된 피해자를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연쇄범죄의 심리단계별 특징
Pixabay-VSRao
김복준의 『연쇄범죄란 무엇인가』에서 설명하고 있는 연쇄범죄의 심리단계별 특징은 이춘재의 연쇄행동을 단계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연쇄살인범죄자와 연쇄강간범죄자의 경우 대부분 살인과 강간이 겹치는 것이 대다수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춘재의 범행에서도 나타난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그는 과연 어떠한 심리 단계를 거쳤을까?
1단계는 심리적 준비이다. 심리적 준비가 발생하기 이전까지는 상대방에게 조용하고 상냥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실제 이춘재의 고등학교 동창은 이춘재가 투명인간처럼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고향의 지인은 그가 인사성 밝은 착한 아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는 이춘재의 심리적 준비가 발생하기 이전의 상황으로서 판단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후각이나 촉각이 예민해지고, 자신의 흥분을 정리하기 위하여 특정 상대에게 특정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를 지속하는 등의 심리적 변화가 나타나면서 심리적 준비단계로 들어선다. 이 단계에서는 현실에 대한 인지능력이나 분석능력이 저하되며, 특히 강박적 충동은 연쇄범죄의 도화선이 된다.
2단계는 낚시질이다. 범죄를 저질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피해자를 찾아 나서는 단계이다. 특정 장소를 선정하여 그 자리에 숨어 기다리는데, 자신에게 이상적인 피해자를 찾기 위해 피해자의 나이나 직업 등을 고려하여 장소를 선정한다. 이춘재의 경우 주로 개발 직전 화성의 농로 등에서 범행대상자를 급습하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춘재가 선택한 피해자는 그 연령대와 직업 등이 다양했던 것으로 보아 ‘피해자를 안전하고 용이하게 포획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예 범행을 하지 않는다(Ronald M. Holmes & Stephen T. Holmes, 2002:118)’는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대부분의 연쇄살인범의 특징이다. 즉 아무리 이상적인 범행대상자라고 하더라도 체포당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실제로 범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범행은 자신의 억제할 수 없는 폭력적 행동욕구를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으며, 상황이 안전하다고 판단될 경우 비로소 실행된다.
3단계는 구애이다. 피해자로부터 관심을 얻고 경계심을 허물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장점이나 미리 계획된 시나리오를 활용한다. 이어서 4단계는 포획이며, 피해자의 주변에 접촉이 없을 것으로 예상될 시 신속하게 피해자를 포획한다. 연쇄살인범은 피해자를 포획하는 과정에서 심리가 고조되고 스릴을 만끽하게 되는데, 피해자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는 기대심리가 발현됨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재확인한다. 이춘재의 경우는 구애단계가 생략되고, 대부분 4단계 포획으로 바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5단계는 실행이다. 이는 연쇄범죄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의식을 치르는 상황을 가리킨다. 이춘재의 경우 1,2차 사건 때는 목조름을 실행한 것으로 보이며, 3차 사건부터는 피해자가 소지하고 있던 천이나 스타킹 등을 이용해 교살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건의 후반기로 갈수록 음부난행은 상습화되며, 피해자의 얼굴을 가리거나 재갈을 물리기도 했다. 연쇄범죄자는 피해자에게 고문을 행사하며 죽음으로 몰아가는 과정을 즐기며, 피해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으로부터 쾌감을 얻는다.
6단계는 회상이며 마지막 7단계는 침체이다. 회상은 연쇄범죄자가 시체를 토템으로 만드는 시기로서, 연쇄범죄자는 시체를 일종의 기념품이나 트로피로 만들고 이를 바라보면서 살인 뒤에 몰려오는 절망감을 극복하고자 한다. 침체는 연쇄범죄자가 급격한 절망감을 느끼는 단계로서, 이때 자책을 지속할 시 연쇄범죄자는 절망감 극복을 위해 새로운 희생자를 탐색하게 되고, 이로 인해 범행은 또다시 순환과정을 거치게 된다.
33년 만에 수면 위로 드러난 범인, PCR과 DNA신원확인정보 데이터베이스(DNA DB)
출처: Pixabay-Gerd Altmann
80년대 당시의 경찰은 해당 사건 현장 및 수사과정에서 많은 증거물을 확보하였으나,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인력, 장비 및 기술력이 미비했다. 그러나 1986년 9월 최초사건 발생 33년 이후, 경기남부지방경찰청 미제수사팀이 2019년 7월 오산경찰서 창고에 보관 중이었던 화성연쇄살인 사건 피해자들의 유류품을 국과수에 DNA 분석 의뢰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한 남성의 DNA가 발견된다.
경찰은 발견된 남성의 DNA를 수감자 및 출소한 전과자의 것과 대조하였는데, 그 결과 1994년 1월 발생한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던 이춘재의 DNA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재수사가 이루어져 이춘재의 자백을 이끌어내면서 용의자가 특정되었으며, 2020년 7월에 비로소 사건 수사가 종료되었다.
그렇다면 무려 33년 전 발생한 사건에서의 증거물로부터 어떻게 범인의 DNA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영구 미제로 남을 수 있었던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바로 PCR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PCR 기술을 활용하면 극소량의 재료만으로도 DNA를 수 시간 만에 20만 배~50만 배로 증폭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사건 발생 당시에는 범인의 DNA를 검출하지 못했지만, 오늘날에는 경찰이 보관하고 있던 증거물로부터 PCR 기술을 활용해 범인의 DNA를 증폭시키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PCR로 인해 증폭된 이춘재의 DNA는 ‘DNA신원확인정보 데이터베이스(DNA DB)'를 통해 더욱 용이하게 발견될 수 있었다. DNA DB는 범죄자와 범죄 현장 증거물에서 분석된 DNA신원확인정보를 수록·관리하면서 상호비교를 통해 무관한 용의자를 배제하고, 신속히 범인을 특정하고 검거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다시 말해, 범죄현장에서 특정 범죄자의 유전자 정보를 확보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유전자 정보를 얻지 않는 이상 범인을 찾기는 힘들다. 이때 DNA DB는 범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의 유전자 정보를 미리 관리함으로써, 확보된 범인의 유전자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을 빠르게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바라보는 박두만의 시선
‘관객석을 향한 박두만의 강력한 시선, 무엇으로부터 발현되었으며, 또 누구를 향해가는 중인가?’ 이는 기사 초반에 던진 질문이다.
봉준호 영화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앞서 언급한 엔딩 장면에 대하여 “송강호(박두만)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유도 범인이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는데, 이는 곧 관객의 범위 내에 범인도 포함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에 대한 분노와 경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이 해석은 과학수사가 발달한 오늘날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보는데, PCR과 같은 DNA 증폭기술은 단지 1ng의 시료만으로도 충분히 범인의 특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완전범죄는 없으며, 범죄자는 반드시 잡힌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박두만의 눈빛은 강력한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위해서는 특히 여자아이가 말한 ‘평범한 얼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평범한 얼굴’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때, 우리는 여자아이가 말한 범인을 떠올릴 수 있고, 박두만을 떠올릴 수도 있으며, 심지어 우리가 길을 걸을 때 마주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도 있다.
평범한 얼굴을 한 사람을 박두만이라고 가정했을 때, 박두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박두만과 같은 80년대 형사들은 비과학적이고 폭력적인 수사를 펼치는데, 수사 과정에서 박두만은 용의자에게 특정 대답을 부추기거나 심지어 증거를 조작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용의자와 그를 쫓던 박두만 사이에 추격전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용의자는 기차에 치여 사망한다. 공교롭게도 용의자가 사망한 장소는 박두만이 의도적으로 신발 자국을 남겨 증거를 조작했던 바로 그곳. 과연 살인의 추억은 오로지 범인만의 추억인 것일까?
세상은 언제나 혼란스럽다. 매일 새로운 피해자, 가해자가 발생하며 때로는 방관자도 발생한다. 누군가의 새로운 살인의 추억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끊임없이 생각해보는 것, 그것이 곧 박두만의 눈빛이 호소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출처>
1. 오윤성. (2006). 현장에서의 연쇄행동 평가를 통한 범인심리 분석 및 행동 추정에 대한 연구(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한국공안행정학회
2. 김복준. (2020). 연쇄범죄란 무엇인가. 우물이있는집.
3. 업다운뉴스, DNA로 33년만에 찾아낸 ‘살인의 추억, 그놈‘...화성연쇄살인사건이란, 2019.09.19.
4. [알쓸범잡 부록]. (2021). https://www.youtube.com/watch?v=ODMsensySl4
5. 대검찰청 디엔에이·화학분석과. (2019). DNA신원확인정보 데이터베이스 연례 운영보고서. 대검찰청 디엔에이·화학분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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