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익
[심리학 신문_The Psychology Times=강우익 ]
2017년 개봉된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23 아이덴티티’는 23개의 인격을 가진 남자 ‘케빈’(제임스 맥어보이)과 그에게 납치된 소녀 ‘케이시’(안야 테일러 조이) 사이의 사건들을 담은 스릴러 영화이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케빈’은 다중인격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23개의 인격이 있으며 인격들은 서로 완벽히 구별되어 존재한다. 성별, 성격, 나이, 기억,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다른 23명의 타인들이 케빈의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들은 서로 대화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들은 협의를 통해 신체와 정신에 대한 장악권인 ‘불빛’의 사용자를 정하는데, 어느 날 모종의 이유로 ‘불빛’의 권한이 인격들 중에서도 가장 부덕하고 폭력적인 3명의 인격에 의해 장악되고 만다.
3명의 인격들은 숨겨진 24번째 인격 ‘비스트’의 숭배자들로, 그들은 초월적인 힘과 파괴력을 지닌 ‘비스트’가 케빈을 대체하는 새로운 주 인격이 되길 원한다. 비스트를 위한 제물로 그들은 3명의 소녀들을 납치하게 되는데, 케빈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소녀들과 그런 그녀들을 막는 케빈의 인격들, 그리고 그녀들을 도우려는 또 다른 케빈의 인격들 사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영화는 전개된다.
주인공 케빈의 다중인격 장애에 대한 정확한 명칭은 해리 정체성 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이다.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편람인 DSM-Ⅴ에서는 해리 정체성 장애를 두 개 이상의 인격 상태, 반복되는 기억상실, 간헐적인 기능적 신경적 증상 등으로 정의한다. 또한, 진단 기준으로 “인격이 바뀌었을 때의 방대한 기억으로 중요한 개인 정보를 회상할 수 없는 상태(일반적 건망증으로 설명되지 않는)에 있을 것"과 "술에 취했을 때의 의식 상실과 같은 행동 직접적인 물질의 생리학적 영향 또는 일반적인 질병으로 인한것이 아니어야 함”을 제시한다.
이러한 해리 정체성 장애는 전 세계적으로 아주 희귀하게 발생하는 정신 질환으로, 아동기에 경험한 극도의 스트레스나 외상이 장애의 주원인이라고 한다. 미국, 캐나다, 유럽의 해리 정체성 환자 중 90%는 어린 시절에 육체적, 성적으로 심한 학대를 당했거나 방치되었으며, 학대를 받지 않았더라도 부모의 상실 등으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대한 자기방어가 장애 증상을 낳는다고 한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인격을 키워, 스스로를 현실과 트라우마 기억으로부터 무감각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해리 정체성 장애의 대표적 사례로는 영화 ‘23 아이덴티티’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빌리 밀리건’이 있다. 그는 1977년 성폭행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다중인격의 존재를 인정받고 무죄를 선고받은 인물이다. 당시 보고에 따르면 그의 안에는 무려 24개의 인격이 존재했다. 10개의 초기 인격과 이후 발견된 14개의 인격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각자의 이름을 갖고 있었고 나이와 성별, 성격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다중 인격이 정말 발현됐는지, 발현됐다고 해도 그러한 이유로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지 등 여러 의문이 생긴다. 때문에 빌리 밀리건의 사례는 아직까지도 세간에 큰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해리 정체성 장애 환자들의 강력범죄 처벌에 관한 이슈는 뜨거운 논의 주제이다. 미국의 경우, ‘주 인격’과 ‘객체 인격’을 구분해서 접근한 판례들을 살펴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현재까지 해리 정체성 장애 환자의 심신상실 또는 심신미약 해당 여부가 형사재판에서 문제가 된 적은 없다. 허나 이러한 환자들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사전적 고민과 준비가 필요해 보인다.
보고에 따르면, 해리 정체성 장애 환자의 대체 인격이 요정, 신, 악마 등의 초자연적 대상인 경우가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고 한다. 트라우마를 이겨낼 만한, 보다 강한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리 정체성 장애는 문화권에 따라 ‘빙의’와 같은 오컬트적 요소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은 해리 정체성 장애를 ‘질병’으로 정의한다. 더 이상 다중 인격은 미스테리나 미신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다른 정신 질환들도 마찬가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신 질환들이 불운을 상징하는 음침한 것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치료 가능한 ‘마음의 병’이다. 육체적 질환과 정신적 질환 사이의 암묵적 차별이 깨끗이 사라지는 그 날, 우리는 더 건강한 자신과 사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 김희정. (2015) '해리성정체장애(Dissociative Indendity Disorder)의 형사책임에 관한 소고'. 법학연구, 18.2, 1-27.
• 해리 정체성 장애-정신 건강 장애 메뉴얼 [MSD 매뉴얼 일반인용]. (2019).
URL: https://www.msdmanuals.com/ko-kr/%ED%9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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