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익
[심리학 신문_The Psychology Times=강우익 ]
코로나 19의 장기화로, 많은 이들이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레드, 코로나 블랙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지속된 고립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우울을 넘어 분노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요즘 유튜브나 SNS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매체에서 대중의 집단 분노가 빈번하게 보여진다.
분노의 대상은 주로 연예인과 유튜버 같은 유명인들이 저지른 ‘잘못’이었다. 그 경중에는 상관없이, 일단 잘못을 저지르면 대중의 타깃이 되며, 타깃에게는 살인적 수준의 인신공격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언젠가 필자는 한 범죄자의 자살을 다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범죄자였기는 하나, 한 생명이 죽은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댓글창에는 ‘죽어도 싸다’는 댓글이 넘쳐났다. 이러한 언행들은 ‘정의’라는 명분 하에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과연 이러한 행위가 정당한 것일까.
행위-행위자 구분의 중요성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 간음한 여자를 잡아 죽음으로 그 죄를 물으려는 바리새인들을 막으며 예수가 한 말이다. 이 일화는 우리에게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간음한 여자의 자리가 우리 자신의 자리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가끔 이 일화가 범죄자에 대한 무조건적 관용을 요구하는 내용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일화는 ‘범죄자를 처벌하지 말 것’이 아니라 ‘범죄와 범죄자를 분리시켜 생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가 떠오른다. 행동과 행동자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행동의 선악은 구분할 수 있지만 사람 자체의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행위는 행위자를 정의할 수 없다. 이것은 사물과 인간의 차이이기도 하다. 가위는 자르는 것으로, 냉장고는 음식을 보관하는 것으로 본질이 정의되지만, 인간의 본질은 잠을 자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는 행위의 이유는 행위자의 본질이 살인자나 도둑으로 정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과거의 서사가 그의 범죄행위를 이끈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들의 범죄가 오롯이 그들의 책임인 것일까?’, ‘내가 그들과 같은 육체와 정신을 물려받고, 그들이 겪은 것과 같은 환경,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내가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비판해야 할 대상을 명확하게 해준다. 우리가 범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저지른 행동뿐이다. 당사자의 서사를 알지도, 겪어보지도 못한 채 그가 지닌 존엄성과 가치를 함부로 평할 수는 없다. 우리는 현재 자신의 모습과 행동이 과거의 서사에서 비롯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타인의 행동에도 서사가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자주 잊는 듯 하다.
개인의 불완전한 도덕판단능력
자신의 도덕판단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나. 아무리 잔혹한 범죄라도 아름다운 배경 스토리가 뒤따른다면 그 경중을 논하는 것이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주말 드라마에 등장하는 악녀를 보며, 우리는 눈을 부라리고 아는 욕이란 욕은 다 퍼붓곤 한다. 하지만 다음 화에서 부모님 없이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그녀의 고달픈 과거사를 듣고 나면 어느새 그녀의 열렬한 팬이 되어 있다.
서사의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에 이바지한 안중근 의사는 대한민국의 영웅이다. 하지만 그의 영광이 살인이라는 행위에서 왔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살인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전쟁터에 나간 군인을 범죄자 취급하는 나라 역시 없다. 살인은 흉악한 범죄라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지만 상황과 동기에 따라 대중의 평가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선악 판단에 서사가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위험성은 몹시 크다. 필요 이상으로 죄를 물을 수도 있고, 흉악한 범죄를 미화시킬 수도 있다. 인간은 공정함을 논하기에는 너무나도 감정적이다. 행동과 행동자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행동자에 대한 감정은 자주 변하지만 행동 자체는 고정 불변하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겁게. 중요한 사건을 다룰 때 잊지 말아야 할 태도이다.
강력하고 위험한 대중의 힘
인간은 감정적이고 윤리적인 동물이다. 타인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고, 불의를 보면 분노한다. 이러한 감정적 특성은 대중을 움직이고 부조리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강한 감정을 공유하는 집단에게는 이성적인 사고가 결여되어 또 다른 부조리한 행동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사회윤리학자 Niebuhr는 그의 저서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집단지성은 개인에 비해 비합리적이고 불완전하며 이기적 충동을 제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덧붙여 그는 집단에서 개인의 도덕성은 흐려지며 선의지의 통제가 없다면 필연적으로 부정의가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다수의 감정에 휩쓸려 한 대상을 공격할 때, 감정을 식히고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돌아봐야 하는 이유이다. 스스로의 비판이 정의 실현의 의지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공공의 적을 세워 집단에서의 소속감을 느끼기 위함인지, 정의 실현을 빌미로 다수의 편에서 본인의 폭력욕을 충족시키려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
집단의 힘은 거인처럼 강력하다. 그들에겐 별 의미 없는 한숨이 한 사람에겐 태풍으로 다가올 수 있다.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했다. 대중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힘을 인지하고 더욱 신중하게 비판에 참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정의, 그 진정한 의미
차오르는 감정을 뒤로한 채, 오로지 한 사람의 행동만을 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가릴 때, 판단의 초점이 행동이 아닌 행위자가 된다면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고 더 큰 악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잘못을 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필자는 범죄자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론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범죄자가 범죄에 응분한 값을 치르도록 노력하는 것은 법치국가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 있어서 다수의 감정에 동화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고해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의를 위해 소리치는 것이 아닌, 그저 분노에 의한 고함은 어떠한 선도 이끌어낼 수 없다. 누군가의 죄악을 그저 헐뜯고 비난하는 대상이 아닌, 스스로를 성찰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아무리 악한 일이라도 그 속에서 최대한의 선을 찾으려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다.
타인을 판단하는 우리의 모습은 극장 속의 관중과도 같다.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되는 상황에 의해 웃고 울고 분노한다. 악역을 보며 분노하고 선역을 향해 박수를 치며 관중들은 스스로가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의는 이렇게 가볍지 않다. 현실에서 완전히 ‘선’에 속하거나 ‘악’에 속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선과 악은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저 다수의 감정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 짓는 것은 옳지 않다. 악 속의 선한 부분이나 선 속의 악한 부분을 함께 보며 전체적인 선을 찾아가야 한다. 아직도 이 세상에 사악한 마녀와 가련한 공주가 산다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동화 속 세상에서 빠져나올 시간이다.
나쁜 악당을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결국 처벌도 일종의 ‘필요악’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을 위해서 ‘필요악’을 차용하되, 그 정도가 본래의 선을 넘지 않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조절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이다. 그렇기에 정의는 무겁다. 비판은 우리 사회에 필수적이지만 비판의 목적이 비판 자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대중의 심판은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며, 그 선은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범주는 비판자와 비판받는 자, 모두를 안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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