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남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선안남 ]
택배로 배달된 책을 기분 좋게 받아 들었다.
설렘과 기쁨에 들떠 있었는데
받은 책의 결함을 발견하고는 기분이 상했다.
책의 몇 페이지가 접히고 붙어 있었다.
고민이 따라왔다.
교환을 요청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접혀 있으면 펴고,
붙어 있으면 떼면 되지만
온전히 새것처럼
깨끗한 상태로는 되돌릴 수 없다.
그래도 교환은 하지 않았다.
이미 나에게 왔고,
벌써 집어 들기 시작했으니
그저 내 것으로 받아 들자 싶었다.
책을 펼치며 세어보게 되었다.
내 안의 접힌 자국과 떼어낸 흔적을,
얼굴에 남은 수두 자국
앞머리를 잘못 자른 애매한 선
머리카락이 들어간 음식
볼펜 자국이 묻은 티셔츠
올이 풀려버린 새 옷
떠나버린 사람의 빈자리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가 살았고 살았으므로
사랑했음을 이야기해주는
자국들 흔적들, 흉터들
어떤 경험을 통과하고 나면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안에 자국을 남긴다.
우리의 시간은
그 이 전과 그 이후로 갈리고
우리는 그 이전의
기억이 남긴 흉터를 가진 채
그 이후의 시간을 밀고 나가게 된다.
그런 흉터들이 모여
오늘의 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오래도록 나를 괴롭혀왔던
그 모든 흉터들은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해 준
나만의 어떤 것을 이야기해주는
내 삶의 증거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하나도 없다.
세상에 경험 자체로
흉터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접혔다 펼친 책의 자국은 이제,
받아들일까 말까를
고민하게 했던 '흠집'이 아니라,
이 책이 '나의 책'임을 이야기해주는
내 일상의 '무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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