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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주인공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 도식(schema)이 인물 판단에 주는 영향
  • 기사등록 2021-10-27 07:54:20
  • 기사수정 2021-10-27 10: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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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한재원 ]



소설을 읽거나 웹툰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초등학생이라면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무서운 인물이라면 낮은 남자의 목소리를, 청순한 인물이라면 여리여리한 목소리로 대사를 머릿속으로 읊는다. 이처럼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등장인물의 몇 가지 특징만으로 내 평소 생각과 경험을 대입해서 목소리를 상상해내는 것이다.

 

예전에 웹툰을 보다가 댓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네이버 웹툰 중 하나인 <마스크걸>을 보던 도중 읽은 댓글이었다. 해당 웹툰의 주인공인 ‘김모미’는 못생긴 얼굴을 가졌다는 설정이고, 특정 계기로 인해 성형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성형 전과 성형 후의 주인공은 같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목소리를 다르게 상상해서 읽고 있었다. 성형 전의 못생긴 주인공은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성형 후의 예뻐진 주인공은 얇고 높은 목소리로 읽었다. 스스로는 이를 인식하지 못했는데 댓글을 보고 나니 큰 충격을 받았다. 본래 가지고 있던 외모지상주의적인 사상으로 인해, 단순히 얼굴이 바뀌었다는 것 만으로 목소리를 다르게 생각한 것이다.


웹툰 '마스크걸'의 댓글

이러한 경험 외에도, 소설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이 변화함에 따라서 나도 모르게 등장인물의 외형이나 목소리를 다르게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선한 역할인 줄 알았던 인물이 알고 보니 악역이었다면 해당 인물의 목소리는 더 낮고 사나워지고, 외형 역시 더 무섭게 바꿔서 상상한다.


또는 여자인 줄 알았던 인물이 알고 보니 남자라면,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높은 목소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바꾸어서 대사를 읊게 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 머릿속에 있는 ‘도식(schema)’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식(schema)의 활성화: 문장마다 바뀌는 등장인물의 모습


도식(schema, 스키마)는 지식을 표상하는 구조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각, 조직화, 정보처리를 도와주는 장기기억 속의 구조화된 기억이다. 예를 들어 사무실을 상상한다면 책상-의자-책장-컴퓨터-방 등을 한 번에 관련지어서 큰 덩어리로 상상해내는 것이 일종의 도식, 스키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스키마에 의존해서 정보들을 여러 개의 덩어리로 묶고, 그에 기반해서 정보를 처리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읽을 때 이러한 스키마는 지속적으로 활성화된다. 만약 여자 인물의 대사를 읽는다면 평소 ‘여자’라는 개념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억과 지식을 바탕으로 해당 인물의 외형이나 목소리를 추측한다. 따라서 높은 목소리, 긴 머리, 작은 키 등의 전형적인 특징을 주로 한번에 떠올린다. 비록 낮은 목소리나 짧은 머리, 큰 키의 여자라는 예외가 실제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곧 인물의 특징이나 행동이 바뀐다면, 다른 종류의 스키마가 활성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 흥미로운 예시가 있다. 교육심리학을 가르치는 Dr. Denney가 스키마 이론의 중심 인물인 Rumelhart로 부터 들었던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각각의 문장은 두꺼운 글씨체로 되어있으니, 밑에 도식에 대해 덧붙여져 있는 문장과 함께 읽어보자.




•샐리(Sally)는 아이스크림 장수가 왔다는 것을 들었다.

: 샐리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 당신은 샐리가 어린 소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갈 것이라고 예측할 것이다. 샐리라는 이름은 여자 이름으로 주로 쓰이고, 많은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장사꾼은 돈을 받고 아이스크림을 팔 것이고, 밝은 색의 아이스크림 트럭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샐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뛰어갔다.

: 샐리는 왜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이스크림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므로, 아마 돈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는 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인 buy-sell schema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샐리는 작은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 샐리는 작은 가방에 무엇을 가지고 나왔을까? 아이스크림 장사꾼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아마 돈을 주머니에 넣어서 가지고 나왔을 것이다. 알록달록한 가방을 매고 나온 여자아이를 떠올릴 수 있다.

 

•아이스크림 장수는 샐리가 가방 속에 손을 넣는 것을 보았다.

: 샐리는 가방에 있는 돈을 집으려고 손을 넣었을 것이다.

 

•샐리는 총을 꺼내서 그를 쐈다.

: 해당 문장을 읽으면 총을 쏜 장면에 대한 스키마가 활성화된다. 이제 샐리는 몇 살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가? 샐리는 여전히 알록달록한 가방을 매고 해맑은 표정을 한 어린 여자아이인가?


당신은 이제 샐리를 어린아이가 아닌 더 나이 많은 사람으로 떠올릴 것이다. 샐리가 있는 장소도 더 지저분하고 어두운 장소로 묘사할 것이다. 문장에 있는 정보가 너무 적다보니, 문장을 읽은 사람이 자신이 가진 도식을 채워 넣게 되면서 이러한 생각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아이스크림 장수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냈다.

: 물을 닦아냈다는 것은 샐리가 쏜 총이 실제 총이 아닌 물총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샐리는 지금 몇 살인가? 샐리는 다시 작은 소녀가 될 것이고, 총에 대한 스키마는 버려지게 된다.

 



해당 예시를 보면 스키마가 이야기를 읽는 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를 알 수 있다. Sally라는 이름만으로 여자아이를 생각하고, 아이스크림 장수에게 간다는 것만으로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총으로 쐈다는 내용만으로 샐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설은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몇 가지 내용만 가지고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이나 경험, 지식을 활용해서 정보가 빈 부분에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서 인물의 특징이 변할 때마다 목소리나 외형에 대한 상상 역시 바뀌게 된다.




외모지상주의와 스키마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필자는 웹툰 속 주인공이 예쁜 얼굴일 때에는 여리여리한 목소리로, 못생긴 얼굴일 때에는 사나운 목소리로 상상했다. 이는 외모에 따라 활성화되는 스키마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인 스스로는 외모지상주의가 없다고 여겼는데, 막상 정보가 부족한 부분에 나의 도식을 채워넣다보니 외모지상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처럼 정보가 적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상하다보면 자신이 특정 개념에 대해 가진 도식을 유추할 수 있다.


정보가 없을수록 빈 부분에 나의 생각을 채워 넣는 것은 효율적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면접은 처음 보는 사람을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적은 양의 정보만 가지고 평가하는 것이다. 면접관이 잘생긴 외모에 대해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고, 못생긴 외모에 대해서 부정적인 스키마를 가지고 있다면, 실제 능력과 상관없이 외모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잣대로 남을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능력이나 성격과 같은 중요한 요소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자신의 스키마를 검토하고, 좀 더 폭넓은 시야를 가지도록 스키마를 수정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스키마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기억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내가 어떤 기억을 쌓느냐에 따라 스키마는 수정될 수 있다. 처음부터 외모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그 견해를 고집하기보다는, 외모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좋은 기억들을 쌓아나가야 한다. 외모와 성격, 능력이 독립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고 생각을 수정하다보면 더욱 개방적인 도식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기존의 도식을 바꾸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앞으로 도식이 의사결정에 주는 영향력을 알고 의식적으로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1] David Rumelhart [EDCI 6340 Learning Theories and Theorists] URL: https://edci6340.weebly.com/david-rummelhart.html

[2] Grison, Sarah and Gazzaniga, Michael, "Psychology in Your Life, 3rd Edition" (2019). Psychology Facul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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