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다연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양다연 ]
권태로운 고양이(출처: pixabay)
Jtbc와 디스커버리 채널 공동제작 음악예능인 <싱어게인>은 무명 가수와 한 때 인기를 끌었지만 잊힌 가수들에게 대중들 앞에 다시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대중의 기억 속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가수들을 다시 화제의 중심으로 불러내 음악예능계에 신선한 한 획을 그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Mnet에서 방영하며 세간의 이목을 끌고있는 여자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스트릿 우먼 파이터>도 유사한 맥락이다. 가수, K-POP 아이돌의 ‘뒤’에서 춤을 춘다는 의미로 ‘백댄서(backdancer)’라고 불렸던 이들이 ‘댄서’, ‘안무가’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의 ‘앞’에 서서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Jtbc의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인 <슈퍼밴드>와 크로스오버 결성 프로젝트 <팬텀싱어>, 채널A의 밀리터리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강철부대>, tvN의 길거리 토크쇼 <유퀴즈온더블럭> 등의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밴드, 퓨전음악, 군대 심지어는 일반인까지. 우리가 비추는 조명의 대상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오직 주인공, 주류, 메이저에만 관심을 가졌던 대중의 관심사가 점점 조연, 비주류, 마이너로 확대되고 있는 현상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주인공과의 ‘권태기’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보는 사람들, 매일 듣는 노래들, 매일 말하는 대사들이 싫어
‘권태’는 단조로움, 따분함, 지루함 등의 감정을 대표하는 말로, 시들해진 감정으로 인한 싫증을 의미한다. 신유리, 전수진 (2021)에 따르면 권태를 느끼는 요인에는 자극의 부족, 제약, 무의미함 등이 있다. 그 중 우리가 기존의 주류를 향한 관심에서 벗어나 비주류를 향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자극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자극의 부족을 경험하게 되는 요인은 단조로운 상황을 겪거나 우리의 능력에 비해 낮은 수준의 경험을 하게 될 때인데,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평소 접하는 비슷한 유형의 콘텐츠는 대중에게 큰 자극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콘텐츠가 제공된다고 하더라도 질적으로 만족감을 주기 쉽지 않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극의 부족을 경험한 대중은 ‘휴식적 권태’를 겪는다. 외부의 자극에 무감각해져 신체, 정신적 이완을 겪는 현상이다. 미큘러스와 보다노비치(Mikulas & Vodanovich, 1993)는 이러한 권태가 차분하고 편안한 경험을 주는 정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쳐서 우리가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창의적인 사고의 결과물은 우리가 권태를 느끼는 대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선 예시와 같이 새로운 장르의 콘텐츠는 권태감을 느끼던 우리의 삶에 들어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 처음 듣는 노래, 처음 말하는 대사도 싫다면?
그러나 모순적으로 기존의 것에 대한 권태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영역들이 도태되는 과정도 권태로 인해 발생한다. 하지만 권태가 발생하는 이유는 조금 다른데, 기존의 권태가 ‘자극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했다면 새로운 권태는 ‘무의미함’으로 인해 발생한다.
새 영역으로의 확장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새롭게 등장한 유행은 군중심리에 의해 빠른 생성, 확장, 쇠퇴의 양상을 보인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겨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과부하를 겪어서 유행을 쫓고자 하는 의지를 쉽게 잃는다.
게다가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나라의 경우 대다수가 쫓는 유행을 개인이 거부하는 것을 기피하므로 내면적으로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 유행의 흐름에 반강제적으로 동참하는 과정에서 행위에 무의미함을 느낀다.
게다가 자극의 부족으로 발생한 권태는 기존에 있던 콘텐츠이더라도 자극을 얻을만큼 강력한 요소가 등장하면 권태가 해소될 수 있지만, 새롭게 등장한 유행에 대한 권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행위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흥미를 잃는 순간 그대로 끝이 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유행이 2~3년 안에 하락세를 타는 경우는 이미 주변에서 발생하고 있다. 트로트가 가장 좋은 예시이다. 2019년 TV조선에서 방영한 <내일은 미스터트롯>은 최고 시청률 35%를 기록하며 국내에 트로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거의 모든 방송사에서 트로트 프로그램을 편성했지만,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트로트 프로그램 때문에 트로트에 질린 사람들이 ‘또로트(또 트로트)’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트로트 편향 현상이 나타났다. 2년이 지난 올해까지도 여전히 트로트 프로그램이 방영중이지만 작년에 비해 수가 현저히 줄었으며, 인기도 예전같지 않다.
또 다른 예로는 EBS의 캐릭터 ‘펭수’를 들 수 있다. 청소년부터 중장년층까지 광범위한 연령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펭수는 외교부,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교육청 등의 기관에서까지 러브콜을 보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펭수 굿즈, 펭수 이모티콘, 펭수 에세이 도서같은 파생 상품을 대거 만들어냈지만 역시나 인기를 끌기 시작한지 약 2년이 된 요즈음, 펭수의 인기는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기지개와 하품과 함께하는 삶, 권태로운 삶을 즐겨보자
철학자 피에르 쌍소(Poerre Sansot)는 그의 저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Du bon usage de la lenteur)>에서 권태를 ‘항상 우리에게 달려들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은 권태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쌍소는 우리가 권태를 경험하는 때는 ‘느긋한 행복감에 젖어서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며 만족스러운 하품을 해댈 수 있는 때’이기에 일상의 피로를 풀기에 적합한 때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권태를 피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에 혈안이 되지 말고,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을 만끽하며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권태의 휴식을 제대로 만끽해야 새롭게 생겨나는 재미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쌍소가 말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표기
박항준, 박현숙 (2006). 가치혁신에 의한 블루오션 시장사레에 관한 연구 – 국내 껌, 냉장고 시장부석-. 마케팅과학연구. 16(2) 55-75
신유리, 전수진 (2021). 디지털 웰빙을 위한 권태 정서 특성 및 경험디자인요소 연구.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회. 4(0) 224-239
최세경, 양선희, 김재영 (2006). 방송프로그램의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분석. 방송통신연구, 171-199
[네이버 지식백과] 권태 [倦怠] (선샤인 지식노트, 2008. 4. 25., 강준만)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838512&cid=42045&categoryId=4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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