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한강훈 ]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등굣길에서 나는 항상 탈출을 꿈꿨다. 도로 오른쪽으로 쭉 이어진 회색 울타리를 볼 때면 괜한 반발심에 가슴이 뛰곤 했다. 내 마음과 달리 도주는 빈번히 실패를 맛볼 뿐이었다. 겨우 허리춤에나 닿을 듯한 울타리에 지레 겁먹어 포기했기 때문이다. 여기, 나와는 달리 멋진 도주극을 펼친 사람이 있다. 영화 <스탠바이, 웬디>의 웬디를 소개한다. 

 


스탠바이



 영화의 주인공 웬디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21살 소녀이다. 유일한 가족인 언니와 떨어져 보호 시설에서 사는 웬디는 꽤 똑 부러진 모습을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정리하고 금세 샤워와 식사를 마친다.


 많은 사람들이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시간을 허비하곤 하는데, 웬디는 그 시간에 이미 아르바이트를 하러 집 밖에 나선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공부를 하고 좋아하는 소설도 쓰며 충실한 하루를 보낸다. 이처럼 웬디는 자신의 일과를 누구보다 성실히 수행하지만, 그녀 주변은 그녀를 그저 도움이 필요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녀에게도 어려워하는 일이 있다. 바로, 예측 불가능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길을 지나며, 같은 일과를 보낸다. 그녀가 처음 보는 상황에 흥분해 돌발행동을 할까봐 보호 시설 원장인 스코티는 그녀에게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정해주기도 한다.


 그녀가 평소와 다른 길을 보고 두려움이 앞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녀의 언니인 오드리 또한 이 부분을 걱정한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웬디의 말에 오드리는 갓 태어난 자신의 아이가 위협받을까 봐 웬디의 부탁을 거절한다.

 

 언니가 돌아가 버리고 웬디는 조카를 보고 싶어 하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렇지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불 밖으로 나온다. 그녀가 고대하던 소설 투고 마감일이 3일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말과 공휴일이 이어져 기간 내에 우편으로 원고를 송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그녀. 이윽고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영화사에 원고를 직접 제출하기로 마음먹는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탈출이 시작된다.

 


첫째 날, 정신의 물질화



 영화사에 가는 길은 처음부터 험난했다. 무서워하던 교차로도 건너고, 길 한복판에 버려지기도 하고, 가진 돈과 소지품을 도둑맞기도 한다.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때,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그녀는 911이 적힌 카드를 꺼낸다.


 이때 911 카드 뒤에 그녀의 조카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버튼 세 개만 누르면 이 힘든 여정을 멈출 수 있지만 그녀는 끝내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꿈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과 조카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그녀를 끝끝내 붙들었다. 조카의 해맑은 표정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911 카드를 버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꿈을 적어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으면 달성 확률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재밌는 연구가 있었다. 목표를 적어 붙인 사람보다 그 목표를 적은 종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더 성과를 잘 이룬다는 연구였다.


 정신을 물질처럼 취급한 것인데, 웬디가 가지고 있던 조카 사진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주 보고 있으니 더 생각나고, 사진을 직접 들고 다니니 그 무게감이 마음까지 전달된 것이다. 이 기대와 무게감이 웬디가 모험을 계속하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날, 목표의 세분화



 웬디를 걱정해 오드리와 스코티가 그녀를 찾으러 왔다. 웬디는 황급히 도망치려다 원고의 일부분을 잃어버린다. 겨우 둘을 따돌리긴 했지만 없어진 페이지를 보고 슬퍼하는 웬디. 그녀는 좌절하듯 고개를 숙이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밤을 새며 빈 페이지를 채워나갔고 아침해가 떳을 때 마침내 원고를 완성했다. 


 어떤 거대한 목표 앞에 사람은 불안해한다. 웬디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내일로 다가온 마감일. ‘다 쓰지 못할 거야. 이젠 틀렸어.’ 그녀의 속마음은 누구나가 떠올릴 법한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보내온 나날에 있다. 심리학자들은 큰 목표를 두고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면 그것을 세분화하라고 말한다.


 바로 앞에 작아진 목표는 허들을 낮추고, 반복된 성취는 자신감을 높인다. 하나하나 부숴나가는 전략이다. 웬디는 이미 이 전략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쓴 원고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겠는가. 그녀는 매일 일정량의 글을 써가며 원고를 완성했다. 그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밤새 한 장 한 장 원고를 다시 써내려갈 수 있었다.

 


셋째 날, 벼룩 효과



 걷고 또 걸어 영화사에 도착한 웬디에게 우편 투고가 아니면 받지 않겠다는 직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다. 직원 앞에서 그녀는 외친다. 마음을 담아 몇 날 며칠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고. 나도 남들처럼 똑같은 기회를 얻고 싶을 뿐이라고. 모험을 통해 성장한 그녀는 3일 전처럼 두려움에 떨기만 하는 소녀가 아니다. 자신을 부정하며 본인들이 정한 틀 안에 가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투사가 된 것이다. 

 

 ‘벼룩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이는 한 실험에서 비롯된 용어로, 1미터 높이의 캔 안에 벼룩을 가둬놓고 투명한 뚜껑을 덮은 실험이었다. 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벼룩은 열심히 뛰었고, 그때마다 유리 천장에 부딪혀 떨어졌다. 시간이 흘러 뚜껑을 치웠지만 벼룩은 캔에서 나오지 못했다. 몇 미터를 가볍게 뛸 수 있는 다리를 가졌음에도 자신의 한계를 1미터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여행길에 그녀를 도와준 할머니는 웬디가 혼자서 떠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말없이 떠난 웬디를 찾아 헤매는 오드리와 스코티도 마찬가지였다. 오드리는 웬디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게 서툴러 문제가 생길 거라고 여겼다. 스코티는 가보지 못한 곳에 웬디 혼자 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웬디의 주변은 그녀의 한계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이런 편견에 반전을 주듯 웬디는 당당하게 자신의 요구를 목소리에 담기도 했고, 처음 가보는 길들을 걸어냈다. 자신이 준비되었음을 믿고 행동한 결과였다.

 


후일담



 이토록 어렵게 투고한 그녀의 소설은 아쉽게도 당선되지 못했다. 그런들 어떠하랴. 그녀는 이 모험에서 많은 성장을 이루어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던 그녀가 자신의 꿈을 위해 미지의 세계를 정복해 나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것과 싸우는 방법을 배웠으므로. 오드리도 웬디의 모험을 계기로 그녀를 인정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웬디가 조심스레 조카를 안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웬디에게서 바통을 건네받은 필자도 뛰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길로, 답답한 기분을 풀고자 달려본 것이다. 몇 번 뛰더니 어느새 작은 목표도 생겼다. 달리는 즐거움을 깨달아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어졌다. ‘마라톤에 참가하기’를 적어 핸드폰 뒷면에 붙여놓고 달렸다. 한 번에 3킬로미터씩 내가 정한 목표가 싫어지지 않을 만큼만 꾸준히 뛰었다. 누적 거리 300킬로미터를 넘기며  달리는 일이 익숙해질 무렵 서울 마라톤에 참가하게 되었고, 비록 10킬로미터 코스였지만 완주도 해냈다. 

 

 스탠바이는 방송 업계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신호로 흔히 쓰인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웬디는 세상에 나섰고, 멋진 모험을 보여줬다. 이 영화와 함께 우리도 스탠바이를 했으면 좋겠다. 웬디가 보여줬던 몇 가지 방법을 배워 우리 각자의 울타리 밖을 모험할 준비를 해보자. 

 

 

*참고문헌 

[스탠바이, 웬디]

장원청. (2020).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미디어숲.

[유튜브]. ‘노쇼’, 그 심리는? (2021). URL: https://www.youtube.com/watch?v=numpratOY9E&t=307s

[유튜브]. 불안과 무기력을 다스리는법. (2021).URL: https://www.youtube.com/watch?v=7cfn8-SgVbA&t=1057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sytimes.co.kr/news/view.php?idx=2283
  • 기사등록 2021-11-01 07:50:36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