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서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서민서 ]
오늘날 신화(神話)에 관심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과학적 사고와 유물론적 사고관이 지배하는 오늘날, 신화는 종종 나쁜 미신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칼 융이 말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신화를 산다. 자신이 어떤 신화를 살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내 생각에 신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준다. 삶을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하나의 신비가 있는데, 자존심이나 편견 때문에 그런 신비를 굳이 배척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서양은 <성경>. 우리나라는?
서양 문명의 뿌리는 기독교에 바탕을 둔다. 개개인의 존엄, 말의 신성함, 겸손과 사랑은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를 둔 가치들이다.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강조하는 가치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다. 서구 사회의 가장 강력한 신화는 기독교이며, 그 신화의 위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신화는 무엇일까? 혹은 동양의 신화는 무엇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나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 몹시 부분적인 설명이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제주도 무속 신화 <원천강본풀이>를 해석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 분석이 동양의 신화를 찾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이의 영웅신화 <원천강본풀이>
<원천강본풀이>
먼 옛날에 적막한 들에 옥 같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아이를 발견한 사람들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어디에서 왔으며,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강림들에서 솟아나서 혼자 살았습니다. 성도 모르고 이름도 모릅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느냐?"
"학이 날아와서 한 날개를 깔아 주고 한 날개를 덮어 주며 먹을 것을 가져다 줘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네가 오늘 우리를 만났으니, 오늘을 낳은 날로 하고 이름을 오늘이라고 하자"
<해석>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늘이'이다. '오늘이'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고 배경이 없는 아이다. 그렇지만 필연적으로 나타났고 살아남았다. '오늘이'는 의식을 상징한다. 오늘날 뇌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의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의식이 출현하는 조건이 무엇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아마 우리 선조들에게도 의식의 출현은 난제였을 것이다. 이렇게 밝혀진 바가 없는 자의식의 출현이 이름도 배경도 없는 아이인 '오늘이'의 출현으로 표현되고 있다.
<원천강본풀이>
세상으로 나온 오늘이가 이리저리 다니다가 박이왕의 어머니 백씨부인을 찾아가자 부인이 말했다.
"오늘아, 너의 부모님 나라가 어디인지 아느냐? 부모님 계신 곳은 원천강이다."
"원천강은 어찌하면 갈 수 있습니까?"
"서천강 흰모래마을 별층당에 높이 앉아 글 읽는 도령을 찾아가 물으면 알 길이 있을 게다"
<해석>
'백씨 부인'은 오갈 곳 없는 '오늘이'를 보살펴준 부인이다. 상식적으로 '오늘이'는 '백씨 부인'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안전하고 포근한 공간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일에는 희생과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이야말로 의식의 본분이다. 삶의 고통과 절망, 죽음에 대한 공포를 회피하지 않고 그 모든 어려움에 맞서서 자신감 있는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역할. 그 역할이 의식의 역할이고 영웅의 역할이다. 여기서 이야기의 '영웅 서사'가 발견된다. 오늘이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무의식을 통합하는 '의식'
<원천강본풀이>
오늘이는 바로 길을 나서서 흰모래마을 별층당을 찾아갔다. 저물 무렵에 별층당을 찾아 들어가자 청의동자가 나와서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오늘이입니다. 부모를 찾아 원청강에 가고 있습니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나는 장상이입니다. 하늘의 명으로 여기서 늘 글을 읽고 있습니다."
"원천강 가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연화못 가의 연꽃나무한테 물어보면 알 길이 생길 것입니다. 원천강에 가거든 왜 내가 늘 글만 읽고 성 밖을 못 나가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해석>
부모님을 찾기 위해 원천강을 찾아 떠난 '오늘이'는 글 읽는 도령 '장상이'를 만난다. '장상이'는 길을 알려주고, 계속 글만 읽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장상이'는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을 경멸하는 자'였다. '장상이'는 추상적인 관념에 대해서는 박식했지만, 현실적인 문제에는 어두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행인 점은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끼고 '오늘이' 에게 이 문제를 털어놓는다는 점이다. '오늘이'는 의식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한다.
<원천강본풀이>
"연꽃나무님. 부모님을 찾아 원천강에 가는 길입니다. 어디로 가면 원천강을 갈 수 있나요?"
"청수바닷가에서 뒹구는 큰 뱀을 찾아가 물으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원천강에 가거든 내 팔자를 좀 알아다 주세요. 나는 맨 윗가지만 꽃이 피고 다른 가지는 피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해석>
'연꽃 나무'도 자신의 문제를 '오늘이'에게 털어놓는다. 연꽃 나무는 맨 윗가지에 꽃을 피우느라 다른 가지에 골고루 꽃을 만발하지 못했다. '연꽃 나무'는 완벽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칼 융은 '균형이 성취되었을 경우에는 그 균형을 깨는 행동이 옳은 행동이다'라고 말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정점에 이른 경우, 그 상태에 만족하지 말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 완벽을 부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완벽은 곧 경직이 되고 서서히 죽어간다. '연꽃 나무'에게는 이런 지혜가 부족했고, 의식을 상징하는 '오늘이'에게 이 문제를 맡긴다.
<원천강본풀이>
바닷가에서 이리저리 구르는 큰 뱀을 만나서 원천강 가는 길을 묻자 뱀이 말했다.
"길 인도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내 부탁도 들어주오. 다른 뱀들은 야광주를 하나만 물고도 용이 되어 올라가는데 나는 세 개나 물고도 용이 못 되니 어쩌면 좋겠는지 모르겠다오."
<해석>
'큰 뱀'이 가진 문제는 '본능의 과잉'이다. 고대인들은 뱀의 모양이 성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으며 성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큰 뱀'은 자신이 가진 탐욕 때문에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큰 뱀' 역시 이 문제를 의식을 상징하는 '오늘이'에게 맡긴다.
마 19:21-22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장상이' '연꽃 나무' '큰 뱀'은 무의식적 차원에 존재하는 하위 인격을 상징한다. 이런 하위 인격은 사회적으로 부적절하고 병적일 때가 많다. 많은 사람이 이런 하위 인격을 억압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신화에서 우리는 정반대의 해결책을 보게 된다. '오늘이'는 '장상이' '연꽃 나무' '큰 뱀'과 같은 하위 인격이 가진 문제와 요구를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문제를 인정하고 포용했다. 여기서 '의식이 무의식의 요구를 인정하고 포용하면 사람은 성숙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
오늘이는 다사다난한 여정을 거쳐 원천강에 도달한다.
<원천강본풀이>
"기특하구나. 우리가 너의 부모로다. 너를 낳은 날에 옥황상제가 우리를 불러 원천강을 지키라 하시니 어찌 거역할까. 할 수 없이 여기로 왔지만 항상 네가 하는 일을 보면서 너를 보호하고 있었단다."
"이제 저는 왔던 길로 돌아가렵니다. 오면서 부탁받은 일이 많은데 어찌해야 할지 알려 주세요."
"장상이와 매일이는 부부가 되면 만년영화를 누릴 게야. 연꽃나무는 윗가지 꽃을 따서 처음보는 사람에게 주면 다른 가지에도 꽃이 만발할 것이고, 큰 뱀은 야광주 두 개를 뱉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주면 용이 될 수 있지. 너는 연꽃과 야광주를 가지면 신녀가 될 게다."
<해석>
오늘이는 원천강에서 부모와 만나게 된다. 작중에서 오늘이의 부모는 사계절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원천강을 지키는 초월적인 인물이었다. '오늘이'가 의식이라면, '오늘이의 부모'는 초월적 윤리의 의인화, 즉 '신'을 상징한다. 큰 틀에서 '오늘이'의 여정은 하위 인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정이었고, 그 방식은 초월적인 존재에게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야기 마지막에 신녀가 된다. 초월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여기에 "의식은 신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는 수준 높은 비유가 담겨있다. 장 피아제는 인간의 발달단계의 마지막은 '메시아적' 단계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가장 성숙한 정체성은 종교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신화를 면밀히 분석하면 서양의 신화와 통하는 면이 있다. 칼 융은 '진리는 몇 개 안 되지만 그 깊이가 너무 깊어 상징으로만 표현된다.'고 말했다. 어쩌면 동서양의 신화는 모두 하나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참고문헌]
신동흔.(2017).우리 신화 상상여행.서울:도서출판 나라말
이나미.(2016).심리학이 만난 우리 신화.서울:도서출판 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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