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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Voyager 기자]


도저히 잡히지 않는 마음의 허전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가 있다. 짜증이 나고 답답해 죽겠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를 때. 나는 MBTI부터 '소심한 INTJ'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싶은 말을 들어도 혼자 꿍할 때가 많았고, 왜 기분이 안 좋은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누가 나 대신 내 마음을 몽땅 해부해서 청소해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친애하는 자판기 회사 대표님에게."라는, 엉뚱한 대사로 시작하는 예고편이 기억에 남았던 <데몰리션>이 문득 떠올랐다. 대충 내가 좋아하는 제이크 질렌할이 나오고, OST가 좋았고, 담담한 힐링 영화.. 왠지는 몰라도 꼭 봐야 할 것 같아 일단 '보고 싶어요'만 눌러놨다. 그렇게 계속 미루기만 하다가 짜증과 피곤함이 뒤섞인 어느 날 밤, 냅다 왓챠 플레이에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더 일찍 봤어야 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제이크 질렌할 주연에<달라스 바이어스 클럽>감독이라니. 안 볼 수가 없었다.

영화는 성공한 인생을 사는 ‘데이비스’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사랑하는 아내 ‘줄리아’와 증권가 애널리스트라는 선망받는 직업, 넓고 아늑한 집까지. 데이비스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고, 병원 로비에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던 데이비스는 무심결에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다. 타이밍 좋게 자판기는 고장 나고, 데이비스는 크게 분노한다.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 대표에게 항의 편지를 쓰다 문득, 그 편지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토해내듯 적어 보낸다. 그리고 그 편지를 읽은 고객센터 직원 ‘캐런’이 데이비스에게 전화를 걸며, 데이비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



줄리아를 잃은 후, 데이비스가 다니는 회사의 CEO이기도 한 줄리아 아버지의 말을 기억한 데이비스는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본다. 사고 직전 줄리아가 사랑하는 눈빛으로 데이비스를 보는 순간에도 그는 휴대폰에서 눈과 손을 떼지 못했다.


2주일 넘게 물이 새는 냉장고는 언제 고치냐는 투정에 데이비스는 생전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줄리아가 죽은 다음 날, 데이비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출근했다. 그의 삶은 완벽했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줄리아와 결혼한 이유를 묻는 캐런의 질문에도, 출근한 데이비스를 걱정하는 직원의 안부 인사에도 그는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모르겠다고.


캐런과 전화로 대화하며, 그리고 캐런의 집에 들러 친해진 캐런의 아들과 이야기하며, 데이비스는 살면서 처음으로 마음 가는 대로 삶을 살아본다.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출근길 한복판에서 춤을 추고, 무단결근도 하면서.


영화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 이 장면만으로 <데몰리션>을 볼 가치는 충분하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어진 데이비스는, 장인어른의 말처럼 자신의 결혼생활을 분해해보기로 한다. 캐런의 아들과 함께 신나게 신혼집을 때려 부수던 중, 데이비스는 냉장고 앞에 항상 붙어 있었지만 한 번도 못 본 메모를 발견한다. 그 메모에는 익숙한 줄리아의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바쁜 척만 하지 말고, 나 좀 고쳐줘요 :)”



그 메모를 본 순간, 데이비스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깨닫는다. 줄리아와 함께 살아온 순간들과 거기에서 오는 감정들. 데이비스는 그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고 돈과 일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마음이 괜찮은지 물어보는 사람들의 질문에 항상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사실은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던 고통을 애써 외면하려 했으니까.


결국은 마주해야 한다, 내 마음을


영화는 아침 하늘을 바라보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밝은 삶을 다짐하는 데이비스의 모습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흐린 어느 날 바닷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데이비스의 얼굴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데이비스의 눈빛은 공허하지 않고, 얼굴도 무표정하지 않다.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알겠다는 빛이 깃든 맑은 눈, 늦었지만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담아 보내는 옅은 미소. 그 마지막 장면은 피곤함과 짜증으로 가득했던 내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졌지만 데이비스의 눈과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맑다.

<데몰리션>을 본 이후로 내 마음을 바다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라고 상상해보기로 했다. 샤워하다가 문득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직관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내 마음이 언제, 왜 파도가 치는지, 어떻게 하면 파도가 잔잔해지는지 등을 기억하고 기록해 두었다. 이런 식으로.


나는 이럴 때 불안하다.


  • • 내가 한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이 나를 우습게/무능력하게/재미없게/매력 없는 사람으로 볼 때
  • •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은데 빨리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칠 때
  • • 지나가면서 지하철 스크린도어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는데 살 찐 것처럼 보일 때
  • • 사랑 받기 위한 필요조건 (외모, 경제적 여건, 말솜씨, 센스 등)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나는 이럴 때 안정을 찾는다.


•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해둔 좋아하는 영화, 드라마 예고편을 볼 때 (주로 서사시, 드라마 장르)

• 긍정적인 느낌의 힙합 곡을 에어팟 프로로 들으며 천천히 걸을 때

• 전시회에 찾아 작품들을 감상하며 공간을 거닐 때 (특히 사진전)

• 오늘 하루, 내가 무엇을 해냈는지 생각할 때 (귀찮음을 극복하고 운동하기, 읽기로 한 책 다 읽기 등)


적어 놓고 보니 참 별 것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데몰리션>에서 주인공이 냉장고를 박살 내는 장면에서 시원함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아, 한도 끝도 없이 쌓여있는 걱정과 불안도 내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구나. 영원한 불안의 파도를 내가 직접 헤쳐나갈 수 있구나. 그런 위안이 들었다.


그날 밤, 참 오랜만에 자기 전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이나 웹툰을 보지 않고 푹 잤다. 푸른 화면 속 세상으로 뛰어들어 애써 외면할 불안함도, 외로움도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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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1-16 07:4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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