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yager 기자
내가 이 정도로 힘들었나?
2년 가까이 상담치료를 받던 집 근처 정신과에서 드디어 종합심리검사를 받았다. 로르샤흐 테스트 (추상적인 잉크 얼룩 그림을 보고 떠올리는 이미지 말하기)부터 인지능력 검사, 주어진 단어 그림으로 표현하기 등등. 마음과 정신을 통째로 엑스레이로 찍는 것 같았다. 2주 후 상담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선생님이 처음으로 꺼낸 말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진수 씨가 좀 많이 힘들었네요. 고생 많았겠어요.
심리적으로 아픈 상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명을 듣다 보니 나도 모르던 고통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나한테 이런 힘든 면도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너무 오랫동안 상처를 방치해 두고 있었구나, 싶어서.
상담을 마친 후, 에어팟 프로를 끼고 이루마 20주년 앨범을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스스로에게 고생 많이 했다는 말을 되뇌며 걷다 보니, 이전에 감명 깊게 본 영화에서 말한 주제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2014년 작품 <와일드>다.
걷고, 방황하고, 마주하다
<와일드>는 미국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미국의 3대 트레일 코스 중 하나인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Pacific Crest Trail, PCT)을 90여 일 동안 걸으며 경험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 원작이다.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과 제작을 맡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서정적인 연기를 보여주며 아카데미 후보에도 올랐다.
95일, 4,300km을 걸으며 겪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영화 <와일드>.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내내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는 일단 걷는다. 야영 장비와 식량을 있는 대로 쑤셔 넣은 배낭을 메고, 4,300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간다. 휴대용 스토브 연료를 들고 오지 못해 차가운 죽으로 삼시 세 끼를 버티고, 발에 맞지 않는 부츠를 신고 걸어 발톱이 빠지기도 한다. 40℃에 가까운 열기와 무릎까지 빠지는 눈더미, 세상의 모든 물을 쏟아붓는 듯한 폭우가 셰릴의 발목을 잡는다.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친절한 농부 가족을 만나 따뜻한 저녁과 샤워를 대접 받고, '부랑자 타임스'의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식량을 선물 받는다. PCT를 걷는 다른 여행자들을 만나 도움을 받고, 여행을 위한 조언을 듣는다. 포기에 대한 망설임과 유혹에 흔들리던 셰릴의 눈빛은 단단해지고,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그렇게 계속 걸으며, 셰릴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의 트라우마와 고통, 상처를 온전히 혼자서 마주하게 된다.
누구나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원한다면.
셰릴의 삶은 아름답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려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셰릴의 어머니이자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만학도인 어머니 '바비'가 유일한 버팀목이고 인생의 전부였다. 가난한 살림에도 항상 긍정적인 바비는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까 마음만 있으면 볼 수 있어. 너도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어."라고 말한다. 셰릴은 대책 없이 긍정적이기만 한 바비가 답답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하고 의지한다.
셰릴의 삶의 이유이자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 바비.
그러나 시간이 지나 바비마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아 세상을 떠나고,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셰릴의 삶은 마약과 싸움, 충동적인 하룻밤으로 채워진다. 정신 좀 차리라는 친구의 말도 듣지 않고, 더 강한 마약을 찾으며 방황하는 날이 늘어간다. 셰릴은 대놓고 바람을 피우기까지 하고, 보다 못해 자신을 도와주려는 남편조차 내치고 이혼하며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사진처럼 지나가는 셰릴의 어두운 순간들. 셰릴의 눈빛은 공허하고 서글프다.
셰릴은 걸으면 걸을수록 더 생생하게, 더 자주 과거의 기억들과 만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기억들을. 90여 일의 시간을 걸으며, 셰릴은 그것들조차 삶의 일부임을, 지금의 자신이 있도록 이끌어준 순간들임을 천천히 깨닫는다. 과거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배운다.
여정의 끝에서 셰릴은 생각한다. 자신의 인생도 다른 모두의 인생처럼 신비하고 고귀한 것임을. 슬픔의 황야에서 자신을 잃은 후에야 빠져나오는 길을 찾았음을. 그리고 매일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수도 없이 감사하다고 되뇌었음을 깨닫는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종착점에 서서, 셰릴은 이 말로 영화를 마친다.
흘러가게만 놓아둔 인생은, 얼마나 야만적이었던가.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서자
종합심리검사 결과를 요약하면, "인지능력은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들이 많아 처리능력이 저하되어 있고, 외부의 말이나 행동을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인다"였다. 이전부터 생각했던 것들이지만 잘 정리된 보고서의 형태로 받아보면서 새삼 내가 얼마나 불행한 삶을 지향했는지 느꼈다. 뭐가 그렇게 불안했을까, 뭐가 그렇게 눈치 보게 많았을까.
지금까지는 이전의 불행한 기억들이 나를 우울과 공황으로 이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셰릴이 그랬듯이. 일을 쉬고 글을 쓰는 지금은 나만의 PCT를 걷고 있다. 그리고 셰릴처럼 부정적인 생각들을 흘러가게만 놓아둔 순간들을 담담히 마주하고 있다. 언젠가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만의 아름다움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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