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yager 기자
왜 나한테만 지X이야?
언제부턴가 하루 종일 저 생각만 하면서 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했을 때만 해도 난 행운아라고 굳게 믿었다. 직장 관련 고민은 남의 일 같았고, 열심히 일을 배우며 쭉쭉 성장하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취업하고 두 달 반쯤 지났을 때,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깨달았다. 회사는 먼저 일한 사람들의 경험으로만 일을 처리했다. 사고 안 치고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직원을 원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더 나은 제안을 만들며 일하는 과거의 상상은 '하던 일이나 똑바로 하라'는 주문에 묻혔다.
1년이 지났을 때, 완전히 맛이 갔다. 점심시간에 뭘 먹자고 해야 센스 없다고 욕먹지 않을지, 어떻게 말해야 감히 다른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지, 언제 짐을 싸고 일어나야 칼퇴한다고 눈칫밥 먹지 않을지. 하루 종일 이런 것들만 생각했다.
나에겐 모든 일이 심각한 사건이었다.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밀어닥치는지 알고 싶었고, 피하고 싶었다. 심각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지, 짜증이 활화산 용암 마냥 샘솟았다.
그때, <시리어스 맨>이 찾아왔다. "인생 좀 심플하게 살 수 없을까?"라고 적힌 포스터의 카피가 방황하던 내 마음을 홱 잡아끌었다. 무슨 영화 제목이 '심각한 남자'인가 싶어 호기심도 들었고. 그래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여느 다른 날과 같이 회사에서 깨지고 집에 온 어느 가을날 밤에.
와장창 요지경 내(네) 인생
<시리어스 맨>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유명한 코엔 형제가 감독을 맡은 2009년 영화다. 기발하게 현실을 풍자하는 능력으로 명성을 얻은 감독인 만큼,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계속 보게 만드는 몰입감이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끝났을 때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강렬한 작품이었다.
영화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이 세상은 너에게만 지X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위험을 피하고 인생을 설계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게 있다."
"그러니, 힘 좀 빼고 살아도 문제없다."
단순한 메시지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아주 색다르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고, 내가 더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좀 더 심플하게 살 수 없을까." 누구나 한 번은 해봤을 바로 그 고민에 대해 영화는 아주 엉뚱하게 답한다.
주인공 래리 고프닉은 대학 교수다. 꾸준하게 강의를 하고 연구 성과를 쌓아 테뉴어 (평생 교수직 보장) 심사 중인 래리.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생각하지도 못한 재앙들이 추석 선물세트 3호 마냥 찾아오기 시작한다.
재앙 1.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 클라이브가 다짜고짜 성적을 올려달라며 그의 책상에 돈봉투를 놓고 간다. 급기야 아버지까지 찾아와 래리에게 항의하고, 테뉴어 심사위원회에 고발 편지까지 쓰며 살림을 위협한다.
재앙 2.
알고 보니 래리의 아내는 바람이 났다. 아내는 아들의 성인식 이후에 내연남과 이사할 것이라며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래리를 호텔에서 자라고 내쫓는다. 부부 명의로 되어 있던 계좌 명의를 변경하는 건 덤이다.
재앙 3.
래리의 동생 아서는 집에 얹혀사는 만년 백수에, 신장투석을 해야 하는 환자이며, 불법 도박에 아동 성추행 의혹까지 받고 있는 시한폭탄이다.
래리는 답답한 마음에 세 명의 랍비들을 찾아간다.
왜 자기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지,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 알기 위해.
야, 나도 몰라!
율법학자이자 존경받는 인생의 선배들. 래리는 랍비들에게서 대차게 꼬인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랍비들조차 하나같이 도움이 안 되고, 래리는 교통사고로 죽은 아내 내연남의 장례비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첫 번째 랍비.
"저기 주차장 보이세요? 딱히 볼 것도 없죠. 하지만 자동차 같은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색다르고 신선한 광경으로 보이겠죠. 결국 관점이에요, 래리. 삶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니까요?"
두 번째 랍비.
"신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냐고? 좋은 질문이네. 하지만 말이야, 모든 걸 알 수는 없어. 그런 것들은 치통과도 같네 래리. 신경 쓰이긴 하겠지만, 어느샌가 지나가지."
세 번째 랍비.
만나지도 못 했다. 비서 왈, "랍비께선 바쁘십니다." 그나마 아들의 성인식 때 아들에게 한 마디 해 주긴 했다. "착하게 살아라."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메시지는 메시지는 똑같다. "낸들 아나?"
인생은 공평하게 지X맞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꼬이던 래리의 인생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놔버린 순간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래리의 아들은 가족의 축복 속에 성인식을 잘 마쳤다. 눈 딱 감고 클라이브의 성적을 F에서 C-로 고치고, 돈봉투에 담긴 3천 달러는 동생 변호사비로 잘 보탰다. 무엇보다, 테뉴어 심사도 통과되어 남은 인생도 교수로 살 수 있게 되었다.
해결되지 않을 것 같던 인생의 난제들이 해결되고 한 숨 돌리려는 래리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이전에 건강검진을 한 의사인데, 엑스레이 결과에서 무언가 발견됐으니 병원에 들러달라는 전화. 래리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그리고 저 멀리서 거대한 폭풍이 불어온다.
이러고 영화는 끝난다. 매우 경쾌한 음악과 함께.
주의: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 것
래리는 애초에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세상의 일들은 말 그대로 그저 일어나는데, 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지 알고 싶어 했다. 래리는 폭풍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매사 원인과 결과를 뜯어보려 하는 삶이 얼마나 머리 아픈 일인지 깨달았을까.
짜증만 가득했던 나도 래리와 비슷했다. 제대로 길을 보지 않고 걷다가 자빠지는 것처럼, 좋은 일과 안 좋은 일 모두 그냥 일어나는 법이다. 나는 사사건건 심각하게 해석하고, 분석하고, 통제하려 했다. 그리고 답을 찾으려 했다. 나만 불행한 이유는 무엇인지.
<시리어스 맨>은 나에게 답했다. 정해진 답이 없는데 정해진 답을 찾으려고 하니까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그저 일어나는 일도 있으니, 단순하게 받아들이라고.
살면서 지구의 70억 인구 중 "나만" 불행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상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이해할 수 없으니 마음과 생각의 무게를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해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살 수 있다는 것. <시리어스 맨>을 통해 그걸 배웠다.
오늘 하루 유난히 재수가 없어서 열 받았던 당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 다 잘났고 나만 안 풀리는 것 같은 당신,
그런 당신을 위해 <시리어스 맨>의 첫 장면에 나오는 글귀를 선물로 남기려 한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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