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남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선안남 ]
0.
어떤 사람과 만나 대화를 해도
굳어지는 방향 패턴이 있다.
가까워질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묶이게 된다.
대부분 그렇게 스며들고 길들여지며
안정감과 친숙함을 얻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해질수록
서로를 자유롭게 낯설게 보기 어려워진다.
1.
나는 T 씨와 이야기하면
계속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상담에서 주로 하는 질문이기는 했지만
T 씨와의 대화에서는 더 자주 동원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원했나요?
그래서 지금 무엇을 원하나요?
이 질문이 말해주는 것은
그의 의존성 수동성 모호성이었다.
그는 다른 누군가의 구원을 원했고
다른 누군가의 이해를 원했고
물어봐주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을 잘 몰랐다.
내 안에도 T 씨가 있었다.
2.
나는 내가 마음이 어려운 상황
도움을 구하고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때
협상을 해야 할 때
마지막 문장을 제대로 덧붙이지 않곤 했다.
어쩌면 마지막 문장이 가장 중요한데,
가장 중요한 문장은 상대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거의 다 말해두고 도망치기도 하고
거의 다 말하기도 전에 자리를 뜨고
그랬음에도 상대가 알아듣기를
숨은 뜻과 의도를,
그것도 내 편에서 헤아려 주기를 바랐던 것
어떤 계획과 의도가 있다기보다
그냥 흘러나오는 대로 두면 나타나는
마음의 굳어진 길, 환상의 길이었다.
그런데
나도 내놓지 않은 내 숨은 문장을
상대가 어찌 알까.
사람들은 모두 자기 문장을 가다듬고
자기 삶을 밀고 가기도 바쁠 뿐인데
나는 어떤 독심술을 가진 사람을 원했을까
나는 왜 이런 숨은 문장 찾기를 흘리고 다녔을까.
그리고 과연
우리의 문장들을 대신 완성해주는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에게 좋은 사람일까
3.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배려해주고 헤아려주는 사람,
자기 삶을 밀고 가면서
다른 삶도 함께 밀어주면서
그는 그렇게 함께 펼쳐가는 사람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통해 나는,
계속 그렇게 같은 지점에 멈춰 설 것이었다.
4.
같이 걷기 위해서는
좋은 그 사람이
나에게도 내내 좋은 사람이 되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말해야 하는 것이었다.
각자의 문장은 각자 마치고
문장들이 마주하는 지점에서 침묵하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서로에 대해,
생각해본 것, 느껴지는 것을
나누고 대조해보고
인식의 간극을 좁혀가는 것
접점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5.
내 문장은 내가 완성해야 한다.
상대의 문장을 대신 완성해주는 일도
그 짐작도, 그 노력도,
속도를 줄여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배려는
대신 완성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문장을 온전히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고 물어봐주고
혀를 깨물어야 이루어지는 일.
6.
때때로 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알아주는 사람은 뭉클하고 고맙지만
그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지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의존은 계속 의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독립을 위해 가는 임시 간이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7.
언젠가부터 문장을 마치고 나면,
나의 마침표를 다시 살피곤 한다.
마지막 한 문장씩 덧붙여야
그래야 비로소 내 문장 완성되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건....
그래서 제가 지금 느끼는 건...
마침표는 내가 찍어야 한다.
묻지 않아도 그렇게 답해야 한다.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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