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남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선안남 ]
1.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집 상태가 좋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공간이 넉넉하고
주방이 큰 집이어서 좋았지만
이사 온 첫날, 냉장고 문이 떨어져 나갔고
오븐과 세탁기는 고장 나 있었고
심지어 마당으로 통하는
문고리는 작동하지 않았다.
집안 곳곳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나
고장 난 물건들 투성이었다.
계약을 하고 나서야 이전 세입자는 나에게
집주인과의 계약 문서를
꼼꼼히 보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는 고장이나도 본인 책임으로 돌리는
계약 문서에 사인을 한 탓에
고장이 나도 고쳐달라고
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의 계약 문서는 달랐지만
이 모든 것을 고치거나
교체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집주인은 시간을 많이 끌었고
교체의 과정은 언제나 불편했다.
이야기해서 관철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많이 들고 과정이 복잡하다 보니
결국 포기하게 된 것들도 있었다.
2.
나는 이런 사항에 마음 앓이를 하다가
근처에 사시는 한국분에게 이야기했다.
그런 뒤 나는 나도 모르게
집주인에 대해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쁜 건 아닌데, 뭐랄까 인색한 면이 있어요.”
더 심각하게 나쁜 집주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감안하고 가감한 말,
또 시간과 과정이 걸리긴 했으나
고쳐주거나 교체해주긴 주니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그랬더니 같이 걷던 분이 걸음을 멈추고
한 자 한 자 천천히 말씀하셨다.
“음. OO 씨,
제 생각에 그건 나쁜 것 같아요.
이 상황에 대한 평가는요, 좋거나 나쁜 거지
나쁘지 않은 건 아니다.
좋은 게 아닌 건 아니다 이건 또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그날도 곰곰이,
또 그 후에도 이따금씩 생각해보곤 했다.
나의 표현과 표현 방식에 대해서
이 속에
내가 나와 관계하는 방식,
사람들과 관계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모든 것을 감안한다는 것,
상대의 입장을 살핀다는 것,
그 이야기 뒤에 숨어있던
나의 진짜 마음을 들여다봐야 했다.
3.
나는 내 느낌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라고 간단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에 대해서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곤 했다.
나는 말 고르기를 많이 했다.
좋은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으나 나쁜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다가도 갑자기 입을 다물게 되는 지점, 해놓고 그 말을 무마하는 지점이 많았다.
'한 사람'을 하나로 판단하고 단정 짓기 어려우니 그렇다고도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마음에는 정답이 없다.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은 하나로 단정 지어도
그래도 괜찮은 것이었다.
아니, 때로는,
단정을 짓고 나서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문장들이 있었다.
4.
좋은 건 아니다.
나쁜 건 아니다.
좋은 게 아닌 건 아니다
나쁜 게 아닌 건 아니다..
대체 이건 무슨 뜻인가.
여러 번 돌아 돌아 가야 알듯 말듯한
이런 화법을 나는 언제부터, 왜,
어떤 방식으로 계속 내뱉어왔는가.
그리고 이 표현들은 왜 시정되지 않고
그대로 쭉 이어졌던가.
나는 누군가를 나쁘게 보는 것이 힘들었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더 힘들었다.
거절도 힘들었고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나는 무엇이든 좋게 보고 싶은 마음
평가당하고 싶지 않은
빨리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쩌면 불편하고 어색한 마음일수록
두발 굳건히 그 어려운 마음을
음미했어야 했는데 싫은 건 싫다
나쁜 건 나쁘다
아닌 건 아니다
하고 딱 잘라서 평가하고 경계를 설정하는 것,
'이건 여기까지입니다' 하고
마지노선을 긋는 것, 이 나에겐 어려웠다.
그래서 한 마디 어렵게 던져놓고도
또 서둘러 그 말을 무마시키기 바빴다.
그것이 그날엔 내 말을 하기가 무섭게
‘나쁜 건 아니에요’ 덧붙이기로 나타났던 것.
고심 끝에 한 페인트칠을 누가 볼까 봐
서둘러 덧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결국 그 칠은 애초의 내 마음을 담아내지도 못했고
표현하고도 찜찜하고
표현을 안 하기도 갑갑한 그런,
갇힌 표현이 되었다.
하는 나도 속 시원하지 않고
듣는 사람도 함께 갇히게 되는 그런 말
아마 그분도 갑갑했을 것이다.
5.
이런 말들이 내 마음에 참 많이 쌓여갔다.
어떤 역할의 자리에 앉으며
나에게 영향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가던 대로, 하던 대로,
한번 가봤다는 이유로 같은 길을 계속 걷는 방식으로
굳어져간 마음의 근육들이 많았다.
때론 이것은 배려라고
때론 이것을 균형감각이라고
때론 이것을 안전이라고
때론 여기에 성숙이라고 이름붙이 기도 했다.
착각하고 자조하고 웅크리며
내 안에 내 표현을 가두는 일이 많았다.
하기 전에도 말 고르기를 참 많이 하고 ,
하면서도 내가 내 말과 다투고
하고 나서도 서둘러 내가 내 말의 힘을
무력화시키려 애쓰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내 말이 분명하지 않기에
타인의 분명한 말이 상처가 될 때도 많았다.
예민하고 민감해서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를
당당하게 말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나에게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을 안다.
쉽지 않아야 하기도 하다.
6.
나는 앞으로도 말 고르기를 많이 할 것이다.
나는 더 나은 말을 구사하기 위해
고심하고 고르고 덧칠하고
편집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많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나에게 필요한 말에 대해서는
내뱉고 바로 수습하려
무력화하고 흐리게 하려 하지 않고
더 버텨볼 것이다.
내가 나의 대변자로
내 말에 내가 힘을 줄 것이다.
나에게는 나쁨으로 다가왔던 많은 것에 대해서
좋았었더라면 하는 공상의 마음 대신
좋아 보였으면 하는 소망의 마음 대신
있는 그대로를 내놓을 줄 아는
솔직한 마음을 구사하는 언어를 쓰고 싶다.
언어에 갇히지 않고
언어로 소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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