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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김자훈 ]



나의 김치윤 친할아버지는 1918년생으로, 한국 나이로 104세로 아직 살아 계시다. 나이가 연로하셔서 점점 더 기력이 없어지시고 있어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에 사시는 큰아버지가 한국에 오셔서 친할아버지 곁에 있으시다는 말씀을 들었다.


필자 또한 평소에 친할아버지가 더 오래 건강히 지내실 수 있도록 기도를 하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우리 인간의 삶은 무력할 때가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필자가 군대 갈 때, 친할아버지께서는 떨리는 필체로 편지지에 “사랑하는 손자 자훈이에게” 라는 글귀를 써서 용돈을 넣어주셨을 때가 생생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는 친할아버지의 육체가 세월을 모두 감당하기 벅찬 것 같아 결국엔 무상한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반면, 나의 아들 김태하는 2020년생으로, 친할아버지와 100년 남짓한 출생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제 막 돌을 지난 아직 작디작은 귀여운 아가다, 그런데, 때로는 이 아이를 보고 있자면 어디서 그런 생명력과 힘이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활력이 넘친다. 소파를 잡고 추는 엉덩이춤은 그야말로 그의 에너지와 흥의 결정체이다.


발육이 빠른 편이어서 이제는 뛰기도 하고, 본인의 의사도 강하게 표현하는데 그야말로 톡톡 튄다. 본인 뜻대로 되지 않으면 큰 소리로 화도 내는 것 같고, 울기도 하는데 웬만해서 지치지 않는다. 아가의 발산하는 에너지를 해소하기 위해 저녁 산책도 나가보고 이 정도 뛰어다녔으면 오늘은 늦지 않게 잠이 들겠지 하는데 어디서 에너지를 충전하는지 밤 10시가 넘도록 잠에 들지 않을 때도 있다.


점점 더 노쇠해져가는 친할아버지와 날이 갈수록 더 에너지가 넘치는 아들의 삶을 문득 깊이 관조하게 되면서, 금방 지나치는 우리의 짧은 인생을 잘 살아보기 위한 지혜로운 접근법이 무엇일까에 대한 물음이 들었다. 몇몇 일을 생각해 보았고, 아래의 전략으로 그 생각들을 더해보기로 한다.


필자는 삶의 굴레 속에서의 지혜로운 접근을 위해 먼저, 필자의 삶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분류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변하는 것, 변할 수밖에 없는 것에는 가급적 단순한 선악의 가치 판단이 아닌 수용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영원성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는 전략을 세웠다.



첫 번째 단계 : 김자훈의 삶에서 변하는 것은 무엇일까?

변하는 것, 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선악의 가치 판단이 아닌 수용을!!



김자훈이라는 사람은 태어나 삶을 살아간다. 갓난 아기에서 시작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란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태어나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나의 육체,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의 수명은 유한하며, 수많은 세포들이 매 순간 탄생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이 나의 몸을 변화시킬 것인데, 나 또한 늙고 (병들고 아프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항상성이 깨져서) 병들고 죽을 것이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의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나의 수명이 늘어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삶의 마지막에는 생물학적인 생명력이 꺼질 것이다.


나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규정할 때, 보통 경험과 기억을 근거로 정체성의 조각들을 맞추어 나가고 있다. 내가 어떤 삶을 경험했고, 그 경험들을 기억 또는 기록으로 남겨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자기 인식을 하게 된다. 내가 한순간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면, 김자훈 이라는 사람의 특징, 정체성으로 여겨지는 삶은 리셋이 될 수 있다.


물론 김자훈 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들의 파편에 의해 다시 정체성을 재구성할 수는 있겠다. 나의 경험과 기억이 생명이 다할 때까지 또렷하다고 해도, 여전히 나의 정체성(Identiy)를 구성하는 기억들 또한 내가 인지하건 못했건 간에 흐려지기도, 왜곡되고 변하기도 한다.


선택적 지각의 끝판왕인 나는 특히나 내 기억력의 불변함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만큼 변함없이 왜곡 없이 사실을 기억할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 또한 왜곡되거나 변할 수 있다.


나라는 사람은 또한 사회적 동물이어서, 가족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 간의 관계는 삶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가장 큰 영향 중의 하나인데, 그러한 인간관계들도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적대적인 관계가 우호적인 관계로 변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한 방향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속한 조직을 주체로 했을 때도 동일할 것이다.


때로는 내가 가진 신념, 믿음 체계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어떤 책을 접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을 접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사람과 소통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수십 년 믿어왔던 믿음의 체계, 신념이 바뀌기도 한다.  인간이 이룩한 합의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과 지식 체계들 또한 역사를 돌이켜 봤을 때,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다.


필자가 추구하는 건강, 돈과 명예, 권력의 Status 모두가 삶을 살아가면서 변할 수 있다. 열심히 운동해서 키운 나의 근육도, 반분기만 쉬어도 흐늘흐늘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건강, 돈과 명예, 권력의 힘의 위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내가 그것을 가진다고 해도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판단된다.


나의 육체도, 신념도, 내가 추구하는 목표나 가치관도,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경험들과 기억들도, 나의 생명력도, 인간관계도, 모두가 변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한없이 무상한 인생일 수 있겠거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면서도, 단순히 변하는 것들을 모두 흘러가는 것이라, 관조하며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든다.



두 번째 단계 : 김자훈의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변하지 않는 것은 영원성에 대한 고찰을!!



변하는 것을 찬찬히 정리해 보니, 필자의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금 더 잔잔히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다소 철학적인 논의처럼 느껴졌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나의 삶에 늘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행동”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행동은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물리적인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이지 않은 행동(의식 또는 무의식 차원에서의 생각 또는 사유라는 의미로  정의해 보기로 한다)으로 나뉜다.


그것들은 단순히 나라는 사람이 지각 가능한 범주의 인식, 인지를 뛰어넘는 “이 순간의 행동” 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찰나의 영원성을 가진다. 국어사전의 사전적 의미로 찰나는 어떤 일이나 사물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매우 짧은 시간이다. 더 복잡하고 엄밀한 사유가 시작되려던 그 순간,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인지의 범위를 넘어선다, 무의식의 영역도 포함한다” 따위의 까다롭고 다소 피곤한 실마리들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풀어가 보는 것으로 하고 쉽게 말해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영원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에 과거도 미래도 끼어들 틈이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현재, 지금 이 순간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제안하는 지혜로운 삶의 접근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굴레도, 미래의 제약도 우리 삶의 영원성을 막을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과거를 잊고,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현재의 쾌락을 위해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한 것처럼 오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에 무척 조심스러운 논의이다. 또한 과거의 과오와 어리석음을 깨닫고, 더 선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냐, 또는 유비무환의 자세로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인데, 온전히 현재의 행동에만 치우치는 것을 옳지 못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변하지 않는 것에 영원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는 하였지만,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을 무가치하다고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선 언급들은 다소 비약적인 가치 판단이 담겨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단지, 필자는 우리의 삶의 굴레와 반복 속에서 과거의 굴레도, 미래의 제약도 결코 지금 이 순간 우리 행동에 절대적인 영향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과거도 미래도 아전인수식으로 마키아벨리식으로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병풍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내가 과거에 했던 어리석음과 교만, 과오를 반성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내가 어떤 상황에 누군가에게서 상처받았던,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큰 트라우마로 지금의 자신을 괴롭힐 때도, 그것들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지금 이 순간의 행동을 더 담대하고, 당당하고, 바르고, 아름답게 펼쳐나갈 수 있다.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고 불안하다고 해도, 여전히 미래의 불확실성 또한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물론 말이 아닌 실천이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 자신을 포함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우리 삶의 굴레 속에서 변하는 것들을 관조하고 수용하자고 말씀드리고자 한다. 과거의 굴레도, 미래의 제약도 결코 우리 삶의 영원성을 막을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찰나의 내 행동이 어쩌면 가장 지혜로운 삶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필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사인, 104세 할아버지와 2세 아들의 삶을 보면서, 삶이라는 변화를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보고자 하였다. 과연 김자훈의 삶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정리해 보았다. 생물학적인 삶과 죽음은 필연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의 기억과 경험 또한 변할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이룩해 놓은 다양한 성취나 업적들이 모두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만, 변하지 않는 것은 단 한 가지, 지금 이 순간의 행동(물리적인 행동과 비물리적인 행동으로 나뉨)이다.


과거의 어려움과 불안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있다면, 그 과거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지금 이 순간의 행동에서 비롯된 긍정성이 있으시기를 가슴 깊이 기원드린다. 또한 미래가 너무 불안정하고, 불확실해서 두려운 분들이 계시다면 또한 여전히 지금 이 순간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 미래를 변화시키는 멋진 주역으로 역할 하시길 기도드리며 글을 맺고자 한다.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가슴 뛰는 용기와 생의 의지와 아름다운 지금 이 순간의 평범함의 영원성을 간직하기를 진심을 담아 마음속 깊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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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1-11 07: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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