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남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선안남 ]
첫 아이를 서른하나에서 서른둘로 가는 지점에서 낳았다. 그때 쓰던 책을 마무리해야 했는데 100일이 안된 아기에게 젖을 먹이다가 어머님이 오시면 바로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가서 글을 썼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한기와 막막함이 잊히지가 않는다.
나는 무엇을 하자고 이 글을 완성하려고 하나,
이 자리가 내 자리가 맞는가.
마음에서 의혹이 절로 돋아났다. 이 질문은 아기를 재우고, 아기를 맡기고, 일터로 향하는 아기 엄마들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고 질문들이고 질문하는 대상과 질문을 받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조금씩 달리 답하게 되는 답이기도 하다. 이런 의혹들이 생길 때마다 단순히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하던 일을 끝내고 나서 생각해보자고.
막막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의혹을 뚫고 쌓아간 끝에 완성한 결과물을 실감으로 만지고 나자,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의혹의 크기는 점처럼 작아졌고 나는 더 이상 ‘일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를 키우는 것도 내 일이고 글을 쓰는 것도 내 일이니까,
아기를 낳고 나는 나라는 한 사람의 정체성에 아기 엄마라는 정체성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일 뿐이니까,
내가 아기 엄마이지, 아기 엄마가 나인 것은 아니니까, 속도를 조정하고 방식은 고민하더라도 그전까지 해왔던 일을 계속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혹에 대한 확신의 답은 그 즉시 주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뒤늦게 찾아왔다. 하지만 그 ‘뒤늦게’라도 주어지는 확신의 답은 다음에 생겨날 수 있는 의혹을 애초부터 작게 하거나, 일어나더라도 금방 잠재우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책을 완성하고 난 후, 책을 읽은 분들의 길고 절절한 이메일들을 받는 날이면 다시 그 한기와 막막함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그러면 다음에 또 그런 삶의 한기와 의혹, 막막함을 느낄 때라도, 나 자신에게 그리고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쓴 책은 그해 말에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웃으면서 울었다. 아기와 함께 기뻐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엄마가 된 나는, 아기의 탄생부터 삶의 첫발을 내딛는 그 길을 동행하는 사람이지만, 아기도 엄마인 내가 가는 길을 동행하는 작은 사람임을, 그렇게 알았다.
4년 터울로 둘째를 낳았다. 두 아기를 낳아 키우며 점점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기 위해 애쓰고 다잡아야 할 부분이 더 커졌다. 주말과 저녁에는 상담실을 운영했고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있는 동안 어린이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글을 썼다. 둘째의 임신 기간 동안에는 걱정도 많았는데 임신 초기에는 하혈을 해서, 임신 후기에는 조산기가 있어서, 내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둘째를 낳던 그 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썼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식을 전하던 에디터분이 혹시나 작가와의 만남(그러니까 나에게는 독자와의 만남)을 하시겠냐고 했다. 당연히 안될 거라고 생각해서 한 질문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으스러지는 몸의 감각을 느끼며 안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몸을 일으켜 신생아실에 가서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둘째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자는 동안 강의를 준비했고 아기를 낳고 처음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남산 정독도서관까지 갔다. 가는 길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이미 몸에 에너지가 없었고 어쩌면 강의를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눈앞에 보이는 돌 위에 한참 동안 앉아서 생각을 했다. 어느 방향으로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쉬다가 가서 힘들면 앉아서 강의를 하자고 마음을 먹고 가기로 했다. 그때까지는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이 흐릿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강의장을 메운 사람들의 눈과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온몸이 전율하면서 모든 것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냥 알았다.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날 책 싸인까지 다하고 집에 가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아기가 우는 소리에 깨서 젖을 먹이며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붙잡고 가야 할 생각은 '완벽이 아닌 완결'이라고,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아기들이 태어났으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것'과' 정말로 할 수 없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거라고.
아이들이 태어나며 한 편으로는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이들 키우며 뭔가를 했을 때 자부심은 더 크게 다가왔다. 책도 썼는데, 조리 기간에 강연도 했는데 이제 못할 게 없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 해를 마칠 즈음에 이 책도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찾아와서, 책으로 끝나지 않는, 책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하나의 글을 마치면 그 끝점에서 다른 시작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아기가 있어도 가능했지만, 아기'들'이 있어도 가능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처음부터 뭔가를 할 수 있겠다고 장담하지는 못했지만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결국 했다. 때로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하기도 했다.
아이를 키우며 어떤 일을 할 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완벽이 아닌 완결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완결의 경험을 한다는 것은 세상 그 누구도 대신 설명하고 의미부여를 해줄 수 없는 것, 그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완결의 경험을 통과하고 나면 우리 내면 어떤 부분이 완결된다. 완결이라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완결이 되는 과정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리를 만든다.
엄마가 되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그것이 완결까지 가는 과정 동안 우여곡절이 정말 많다. 외부의 압력, 환경의 압박도 있고 내면의 걸림돌과 의혹들도 마음을 수시로 어지럽히고 흔든다. 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완결을 하면 그 모든 것이 더 큰 의미로 돌아오게 된다. 그 완결의 과정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자주 '어찌어찌했다'는 말을 많이 쓰게 되었다.
책을 써나가는 과정도, 아기를 낳아 기르는 것도 같은 면이 있었다. 때론 벅차고 막막하고 압도되지만 언제나 어찌어찌 아이들이 자고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을 넘겨보고 난 후에야, 어떤 산을 올라보고 난 이후에야, 하나의 힘겨운 시간을 통과한 후에야, 내 안에 남는 경험치와 의미는 다른 곳에 가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은 꾸준한 경험의 힘이다. 안될 것 같더라도 한 발자국만 더 가보면 알게 된다. 애초부터 가능한 것이었기에 나에게 주어졌음을. 돌아보면 아이를 키워나가며 미리 할 수 있다고 장담은 못했을 뿐, 하면서도 다 할 수 있을지 자주 의혹을 느꼈을 뿐, 돌아보면, 결국 하고 싶은 것은 완결을 했다. 시간이 더 걸리고 과정 속 '어찌어찌가 더 많았더라도.
지금 나는 셋째를 낳고 영국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이가 셋이 되고 글을 쓰기가 더 힘들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글을 쓴다.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앉아 글을 쓴다. 노트와 포스트잇과 펜은 도처에 존재한다. 주방 식탁 서재 아이방 침실이 따로 없다. 아이들이 잠드는 그곳이, 그 곁이 나에게는 글을 쓰는 공간이 된다.
자주 액셀을 밟으려는 찰나,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고 정지해야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또 그럼에도, 계속 가긴 간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의 아이들을 차례로 키워내는 시간 동안, 버스에서 잠든 아기, 카페에서 잠든 아기, 등에 업혀 잠든 아기를 곁눈질하며 유모차를 흔들며, 또 때로는 몸을 흔들며 글을 썼다.
글은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동화책 한 귀퉁이에, 슈퍼에 가기 전에 생각이 날 때마다 시장거리를 적던 메모 패드 사이에, 짬짬이 읽어나가던 책 한 귀퉁이 여백의 자리에, 내가 주로 활동하는 공간에 놓여 있는 노트들 속에 있던 메모들로부터 시작해 조각조각 기워져겼다. 그 조각들을 얼기설기 이어 조각보 글을 '완결' 했다.
글을 쓰는 방식마저 진화했다.
셋째를 낳기 전 나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만 글을 쓸 수 있던 사람이었다. 노트에 쓰고 컴퓨터에 옮기는 방식으로만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엄지손가락으로 바로 휴대폰에 글을 쓰기도 한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방식이 아닌 주어진 제약 속에서의 최선을 지향하게 되었다. 글쓰기도 육아도 최선이 아니었던 것으로 새로운 최선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저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한다'는 것, 그 지속가능성이 나의 일에도 육아에도 중요하고도 절실한 힘이 되었다.
이런 글 쓰기는 내 마음을 직선으로 가 닿아서 그대로 표현해내는 글쓰기가 될 수 없다. 항상 우회로로 갔고 아이들의 마음과 욕구, 동선을 지나 갈지자가 된 후에야 다시 조금씩 모아가며 다잡아가며 쓰게 된다. 메모는 많았고 뒤늦게 그 메모를 붙잡고 노트 뭉치와 펜을 잡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들에 마음이 어지러울 때가 많다. 그렇게 결국 애초에 쓰려고 했던 것을 다 주워 담지 못한다는 것, 그러기에 분명하고 확고하게 쓸 수없음을 쓰기 전부터 알게 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계속 쓰게 되었다. 추릴 수 있는 것만 추려서 가도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이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육아하면서 쓰는 문장들이란, 모든 시작의 문장이 실타래처럼 뭉쳐있고 뚱뚱하고 산발적으로 흩어진다. 출발선부터 나는 절대로 내가 쓰고자 했던 그 글을 쓰지 못할 것임을 안다.
이 문장을 쓰다가 글이 궤도에 오를 찰나 자던 아이가 등을 긁어달라고 엄마를 부를 것임을 예감하며 심장이 뛰기도 한다. 아이들이 낮잠 자는 동안 일어나면 먹이려고 올려놓은 감자가 탈까 봐 서재와 주방을 오가다가 결국 그 가운데 자리에서 타는 냄새를 감지하며 언제나 엄마와 작가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를 하며 글을 쓴다. 그래도 하나의 글을 완성해 나갈 때마다 어떤 안도와 전율을 느낀다.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그 지점부터 내 육아의 진짜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한다. 마침표가 없는 육아의 길에 중간중간 마침표를 찍어가며 쉼표를 세우고 질문에 대한 이미 주어진 답이 아닌 새로운 질문을 여는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엄마인 나, 엄마인 우리들의 모습을 더 생생히 실감할 수 있다.
마치지 못한 문장들은 점점 더 늘어나지만,
그렇게 새로운 문장들이 또다시 돋아난다.
오늘도 아이들을 재우고 숨소리 발소리를 죽이며 빠져나와 정리되지 못한 식탁의 물건들을 한구석에 몰아넣고 막내의 기침 소리를 걱정하며 이 글을 쓴다. 글은 써지는 날보다 안 써지는 날이 더 많고 눈 앞에 희미한 안개가 낀 듯 모든 것을 멍하게 시작한다.
그럴 때면 데자뷔처럼 익숙한 의혹에 휩싸이게 된다. 내 의혹은 다른 엄마들의 의혹, 불확실한 삶의 여정과 기로 한가운데에서 매일 자신의 선택들과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기를 선택해야 하는 압박을 가진 사람들의 의혹들에 겹쳐진다.
나는 왜 (아기를 맡기고) 글을 쓰는가?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한다.
아기가 태어났으니, 내 인생을 함께 할 동행자들 생겼으니, 엄마는 내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싶다.
지금은 아기들과 함께 갈 길을 터나 가느라고 더 잘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거나 더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냥 적어도 나를 나이게 하는 일들, 아기를 만나기 전부터 나의 많은 것을 구성해오던 나의 일을, 꾸준히 계속해나가고 싶다. 아이가 있음에도 가 아니라 아이들이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꾸준하게 하고 싶다고.
그래서 이제는 " 왜 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세명의 아이를 키워내며 글을 써온 시간의 경험치를 실어 조금 더 두터워진 목소리로 답을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기에.
나를 생생하게 하고
나를 전율하게 하는 일이기에
그 전에도 해왔지만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이기에.
나를 이 세상과 끈끈하게 연결되게 하고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라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미를 가진 일이기에.
엄마로 사는 시간도 소중하지만
엄마 아닌 나로 사는 시간도 절실하기에
육아를 하는 시간도 소중하지만
육아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절실하기에.
쓰고자 했던 글을 마치고 나서야 육아의 시간에 온전히 나를 투신할 수 있는 나를 보며 생각한다.
글을 쓰는 이 시간, 내 일을 하는 이 시간, 은 나에게 또 하나의 육아의 시간이라고.
아이들과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있어도 엄마들은(그리고 아빠들은) 여전히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아이가 부른다.
오늘의 글은 여기까지,
이제 나는 아이들 곁으로 가,
새우잠을 자며 고래의 꿈을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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