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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선안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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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계획이 있었다. 원대한 계획이었다. 아빠가 집에 있는 주말이니 아빠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그동안 내내 흩어지고 산란된 집의 이곳저곳을 정리하고 정비하고, 밀린 집안일을 해결하고 쓰고 싶었던 글을 쓰고 읽고 싶었던 글을 읽으며 내 마음을 다시 회복할 생각이었다. 주중의 모든 힘겨운 순간들이 이 계획으로 버텨졌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일상의 계획이란, 결국 깨지라고 있는 것.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복병인 것, 그 전날 아빠와 함께 외출하고 돌아온 둘째의 얼굴이 손톱자국으로 얽혀있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무료해지고 피로해진 첫째가 얼굴을 할퀸 것이다. 또 그날 첫째는 키즈카페에서 놀다가 모르던 아이 셋이 떼로 공격하는 바람에 자기 키보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아빠가 갔을 때는  공격했던 아이들은 이미 자기 엄마들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나 있었고 첫째 혼자 코를 잡고 웅크리고 울고 있었다고 했다. 셋째는 이제 주말에 아빠가 안으면 엄마와 헤어지는 것을 알고 자꾸만 차에서 운다.  그런데도 그냥 보낼 수 없어, 망설인다.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오늘 아이들은 ‘엄마 갔다 올게’ 대신 ‘엄마도 같이 가자’를 합창처럼 말한다. 마음이 두 쪽으로 나뉜다. 아프게 흩어진다. 어느 쪽 선택을 해도 놓을 수 없는 마음. 아이들을 보내고 나면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시큰하지만 오늘은 더 시큰해서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을 것만 같다. 결국 오늘은 아이들을 따라나서기로 한다.



"일단 같이 가기는 하자!"

 

차에 타니 아이들이 함지막 한 웃음으로 이야기한다.


 

'엄마 벨트만 매면 돼.' 다정한 잔소리

'엄마 이거 먹을래?' 다정한 제안

'엄마 옷 입어', 다정한 재촉


 

우리 집에서는 이렇게 내가 최고의 인기인임을 실감하고, 코가 시큰해지려는데 그 감동이 가슴에 닿기도 전에 아이들은 다시 아이들 본연의 모양으로 돌아간다. ‘엄마엄마’ 앞다투어 뭔가를 요구하고 투정하고 다툰다.



엄마 저거 주워줘

아, 엄마 얘가 내 것 가져갔어

벨트가 이상해. 다시 매 줘요.

우유! 우유!

쿠키! 쿠키!



아이들을 둘러싼 각종 느슨해진 몸과 마음의 끈들을 다시 짱짱하게 점검해주고, 필요한 것을 쥐어주고, 다툼을 말려주고 손 바쁘게 마음 바쁘게 미세조정을 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동안 주말 동안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런던 근교의 모든 키즈 카페에 발도장을 찍으며  돌아다닌 남편을 생각하며 코가 시큰해지려 한다. 대체 남편은 이 천방지축 청개구리 아이 셋을 뒤에 태우고  어떻게 나 없이 그 시간들을 지나왔나 싶다. 그 마음을 아는지 남편이 말한다.


“애들이 엄마가 없을 때는 알아서 하던 것도 엄마가 있으니까 다 해달라고 하네.”


"원래는 잘 있어요."


셋째가 눈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내 손을 잡는다. '엄마 갔다 올게'하고 씩씩하게 잘 다녀오는 것도 짠하지만 '엄마 가지 마. 같이 있자'하는 것도 짠하다. 어느 쪽이든 짠하기는 마찬가지. 내 마음은 언제나 동요 상태.


얼굴이 아닌 엉덩이를 보이며 뒷걸음쳐서 내 무릎에 안착하는 아이들이, 당연하게 요구하는 사랑에 나는 내내 웃다가도 자주 피로하고 갑갑해하곤 한다. 그러면서 빨리 크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아이가 내 품 안에서 놀던 이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라는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 커라 커라 빨리 커서 내 무릎이 아니라 너의 책상에서 책을 꺼내 읽고 너의 발로 책을 만나러 더 멀리멀리 떠나올 수 있는 능력을 기르거라', 속으로 속삭이곤 했다. 오늘은, 또 이런 마음들이 더 심하게 오락가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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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즈 카페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나에게 이 곳을 소개하고 싶어서 앞다투어 방향을 가리키고 ‘엄마 이쪽이야’ 가이드 역할을 한다. 내가 없을 때는 오빠들의 속도에 맞춰 혼자 계단을 오르내리곤 했다는 셋째는 오늘은 나에게 양손을 뻗어 안아달라고 한다. 이제 막 두 돌을 지난 셋째를 안고 계단을 오르니,  아이들이 엄마 없이 이 곳의 계단을 씩씩하게 밟던 시간들이 겹으로 안겨오는 듯하다. 또 한 번 더 콧날이 시큰해진다. 내내 아이들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다렸던 주말인데 이 주말을 위해 내가 참아오고 견뎌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나를 위해 참아주고 견뎌준 몫들이 있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차에 올라탈 때까지만 해도  나는 수정된 계획을 안고 있었다.  아이들과 아빠를 내려놓고 엄마는 근처에서 글 쓰고 올 테니 놀고 있으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흥분한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나갈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엄마인 나에게는 어떤 착시가 장착되어 있어,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만 봐도 조마조마해서 결국 마음을 놓지 못하고 따라다니게 된다. 자꾸만 양말을 벗는 것도 아슬아슬하고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부딪치며 노는 것도 아슬아슬하고 셋째가 혼자서 삼층 높이에 해당하는 놀이기구에 굴러가듯 오르고 또 오르고 있는 것도 아슬아슬하다. 또 그러면서 그전까지 나 없이 왔던 시간 동안 아이들이 이 미로 같은 놀이공간에서 웃고 떠들다가, 또 넘어져서 울다가, 다른 친구와 부딪쳐서 아파했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또 일어나 웃고 떠들었을 그 시간들을 생각하며 여러 마음이 든다.


결국 끝내 아이들 곁에 남고 만다.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하고 하품을 하며 아이들을 쫓아다녔다.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나는 피로했다. 좋으면서도 피로했고 또 좋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허망했다. 역시 아이들을 키우며 계획은 세워야 할 수밖에 없으나 너무 원대한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기대하는 그만큼 실망하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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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20년도 더 된 기억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맨투맨을 풀다가 읽었던 그 이야기가 아이를 키우며 생각날 줄은 몰랐다.

이런 이야기였다.




매일 바쁜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는 어느 날 아빠를 조르고 졸라서 아빠와 함께 낚시터에 간다.

가서 하루 종일 낚시를 하고 놀다 집에 돌아온다.


그날 밤, 아이는 일기를 쓴다.

“오늘 정말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아빠 역시 일기를 쓴다.

“오늘은 아이와 놀아주느라 일을 하지 못했다. 하루를 날렸다.”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그때는 내가 내내 아이로만 살아왔던 시간 속에 있었기에 아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아빠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면서 그래도 여전히 아이 마음에 기울어가며 이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를 만났던 첫 느낌, 수능 대비 영어 지문을 풀면서도 느꼈던 그 첫 느낌을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요한 것들 사이에서 그때 그때 더 중요한 것, 가능한 것이 맞춰,  매 순간 미세 조정하고 다시 계획을 수정하고 또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하기에, 그래서 힘들다고 느낄 뿐,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실망할 것도 없고 하루를 날렸다고 생각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내 곁에 있는 존재들,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존재들, 나를 가장 방해하는 존재들, 내 말을 가장 많이 듣지만 또 제일 안 드는 존재들을 다시 본다.

나는 언제나 그들의 세계를 미세조정해주느라 눈썹이 휘날리고 마음이 꺾이지만, 또 언제나 소박한 계획을 세우게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이미 그것으로 하루 치의 의미는 충분하다.

 

하지만 역시 아이들은 엄마가 이런 성찰을 할 시간도 충분히 주지 않는다. 투닥거리며 거실 바닥에 낭자하게 장난을 쳐놓고 엄마 엄마 부르며? 서로가 서로를 일러바치는 첫째와 둘째를 보다가 ‘아 대체 누가 그런 거야?’라고 질문이 아닌 한숨을 내쉬는데, 저쪽에서 입이 아닌 얼굴로 요구르트를 훔쳐 먹던 우리 집에서 제일 작은 사람이 눈을 깜빡이며 소리친다.


‘내가!’

 

요즘 ‘내가 병’에 걸린 시기를 요란하게 지나가고 있는 말괄량이 셋째다.


그 소리에 넷이 한 바탕 까르르 웃고, 나는 아이들이 오늘의 마음 일기에 행복했다고 적기를 기도했다. 그러면서 내 일기를 이렇게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야 쓴다.  계획은 깨지라고 있는 것, 아이들이 크는 동안에는 언제나 소박하게 세울 것, 아이들의 세계를 미세 조정해가며 기대치도 미세조정해갈 것. 이런 시간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내 품 안에서 벗어나 자신의 두발로 걸어가 책을 고르는 신통방통한 뒷모습을 보게 될 터이니, 또 그때 가서 이 시간이 사무치게 그립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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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3-03 07: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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