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김경미 ]
고등학교 시절 소위 말하는 날라리 껍데기인 후배를 알게 되었다. 별로 친할 계기도 없는 친구인데 우연한 계기로 후배가 나를 따르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직접 만든 열쇠고리를 선물하기도 하고 오가며 만나면 “언니! 언니!”하며 따라오곤 했다. 그 친구를 보면 노는 친구 같은데 크게 사고도 안치고 조금 다르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얘기하니 후배가 의미 삼장 한 말을 했다. “언니 나는 말이야. 사고 안쳐. 왜인 줄 알아? 엄마가 날 믿어주니까. 그 믿음이 너무 확고하니까 내가 그 믿음을 깰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좀 노는 거 같아도 난 사고 안쳐. 앞으로도 사고를 칠 일은 없을 거야!” 후배는 밝은 표정으로 엄마의 확고한 믿음이 자신을 붙들고 있다는 말을 자신의 언어로 들려주었다. 그렇다. 부모의 믿음은 아이를 붙드는 힘이 되어 준다. 그리고 그 사랑과 믿음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참 행복한 아이일 것이다. 어쩌면 많은 아이들이 이 믿음에 배가 고파 다른 길들을 선택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고 교육학을 전공하며 아이들이 조금 더 편안하고 행복한 세상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은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살아가다 보니 그 생각은 더욱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학생자원상담 봉사자 연수를 하며 경기도권의 아이들의 자해와 자살실태를 밀도 있게 듣게 되었다. 그 시간을 통해 많은 아이들이 불행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대면하게 되었다. 더욱 놀랬던 것은 예전에 비해 그 연령이 더 낮아져 초등 저학년 친구들에게도 이러한 빈도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원인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 조그만 아이가 어떤 목표가 있어 공부에 그렇게 목을 매고 스트레스를 받았어야 할까? 어쩌면 자신은 감당이 안 되는 누군가의 목표를 짊어지느라 버거웠던 것은 아닐까?
여성가족부의 통계에 따르면 2017년 인구 10만 명당 기준으로 청소년(9~24세) 사망원인 1위가 자살(7.7명), 2위 운수사고(3.4명), 3위 암(2.7)이라고 했다. ‘청소년이 죽고 싶은 이유’는 학교 성적(40.7%), 가족 간 갈등(22.1%), 선후배. 또래 갈등(8.3%) 순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피치 못 할 병이나 불의의 사고로 죽는 아이들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는 친구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의 높은 비율이 성적에 있다는 것이 뜻밖의 내용은 아닐 것이다.
교육 강연 영상에서 이러한 사례가 담긴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꽤 우수한 성적의 친구가 부모의 높은 기대감과 성적 압박에 힘들어하며 몇 번의 도움을 부모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요구가 무시된 채 “1등만 하면 다 해결돼. 너도 알 거 될 거야. 하라는 대로만 따라와. 그럼 너도 결국 만족하게 될 거야. 목표는 1등이야.”라고 엄마는 말했다. 그 후 딸은 엄마에게 1등이 찍힌 성적표를 내밀더니 “이제 됐지. XX야.”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자녀가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 본연의 모습을 믿어주지 못하고 아이에게 원하는 모습을 해낼 것이라는 믿음만 강요한다면 아이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목표만을 강요하는 부모 앞에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했다는 마음이 엄마에게 그런 비인격적인 말을 남기고 떠나게 한 것이다.
흔한 눈으로 바라볼 때는 미래가 없어 보이고 저렇게 사고 치다 잘 못 된 길을 선택할 것 같은 친구는 바로 이 후배였을지도 모른다. 공부는 좀 못하고 사람들 눈에는 언제 사고 칠지 모르는 불안정해 보이는 딸이지만 그 딸을 온전한 믿음으로 바라봐 준 엄마 덕분에 후배는 지금도 언제나 맑음이다. 자기만의 액세서리 사업을 하며 여전히 자신의 길을 행복하게 가고 있다. 자신을 늘 믿어주는 엄마를 끔찍이 여기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이를 믿어주는 것 안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 자체로 감격하며 아이 안에 그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줄 때 아이는 안정감 안에서 성장한다. 아마도 내가 저 출산의 시대에 아이 셋을 낳고도 출산드라처럼 순풍순풍 순산으로 낳았다면 넷도 좋았겠다고 외칠 수 있는 것도 육아의 정답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늘 아이들 스스로 아이들의 길을 잘 가줄 것이라는 믿음이 내 중심에 있다. 육아에도 정답이 없듯 자신의 길에도 정답이 어디에 있겠는가? 길이라는 것이 걷다 보면 나오고, 없던 길도 만드는 것이 길이 아니던가? 지금 마음과 몸이 건강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고 있다면 잘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내 안에 숨어 있는 불편한 진실들을 만날 때가 있다. 아이들을 믿어 주는 믿음 육아라고 말하지만 그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힐 때면 내 액면가가 드러난다. 순수하게 아이들의 마음과 몸만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아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잘해 주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지 않게 아이의 부족한 모습을 맞닥드렸을 때 그제야 베일을 벗고 나를 정면으로 만나보게 된다. 여전히 내 안에 있는 욕심, 기대치들을 대면하고 만다. 믿음 육아를 했을 때의 건강한 아이들의 표본으로 자라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내 마음이 고개를 내민다.
‘아이들 사교육 좀 안 하면서 크면 안 되나?, 아이들이 맘껏 놀면서 크면 안 되나?’ 하는 내 반항기가 육아 도전기가 되어 그냥 좀 그렇게 안 키워도 잘 큰다고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아이들의 모습에 화가 나거나 실망감이 찾아올 때,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들과 내 안에 숨어 있는 욕심들을 만나게 된다. 나도 내가 바라는 교육철학과 내 마음의 숨어 있는 불편한 진실들과 계속 힘겨루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점점 더 내 안에 숨어 있는 욕심들이 힘을 빼기를 바란다. 순도 백은 못 될지라도 고순도를 바라보며 믿음 육아의 길을 가기를 원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엔 그 흔한 방문 선생님도 오시지 않았고 가는 학원도 없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딸들은 피아노와 체력을 단련하는 합기도 외에는 아이들 스스로 해나갔다. 늘 마음 한편에 아이들보다 내 욕심이 앞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에 방문 선생님을 모시는 것조차 한번 더 생각해야 했고 주저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 스스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육아를 하다 보면 육아 선배들이 묻지도 않은 훈수들을 쏟아 놓는다. 영, 수 학원 없이는 힘들다는 말들, 피아노 전공할 것도 아닌데 취미로 얼마 후면 중학생인 아이를 피아노를 가르치냐는 말들을 듣고 있으면 내가 듣고 싶은 말들에 갈증이 났다. 그때 이적의 엄마로도 유명한 박혜란 여성학자님의 ⟪믿음으로 키우는 육아⟫,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며⟫를 읽으며 내가 쓴 책인 양 내 속을 후련하게 해주는 책에 한없이 유쾌 상쾌 통쾌했던 기억이 난다. 저자는 말한다. 아이들을 아이들 뜻대로 자라게 하지 않고 부모의 뜻대로 키울 만큼 얼마나 성숙한 뜻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지 말고 아이들 스스로 무럭무럭 커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 참을성 있고 어려운 일이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라고 전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녀들이 행복한 아이들로 자라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찐하게 믿어주자. 누군가의 믿음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그 안에서 자신을 지탱할 힘을 얻을 것이며 그 자라 가는 과정 자체가 행복의 여정일 것이다. 아이들을 믿어 줄 때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육아의 길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그 참을성 있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 엄마가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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