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한국심리학신문_The Psychology Times=김경미 ]
결혼하고 한 십 년쯤 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다. 바로 내가 족발을 무지 좋아했었다는 사실이다. 족발을 싫어하는 남자랑 한 십 년 넘게 살다 보니 내가 족발을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의 고통이었으면 이렇게 잊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함께 맛있게 먹을 것들을 찾고, 서로 좋아하는 곳을 바라보다 보니 나만 좋아하던 것을 놓는 것들이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만큼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육아도 딱 그런 것 같다. 육아의 시간이 너무 좋아서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온 시간이었다. 아니 너무나 소중한 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 엄마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쏟아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육아에 폭 빠진 듯 아이들과 놀다가도 내 가슴 깊이에서 소란하게 날개 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파닥거리는 그 날개들을 잠재우느라 며칠 마음이 혼자 벅찬 날들이 때때로 찾아왔다. 잊을만하면 꿈속에서 아이들을 활기차게 가르치고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는 나를 만났다. 일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까마득히 잊고 있는데, 너무 생뚱맞은 꿈이다 싶으면서도 내 무의식에서 말하는 갈증들을 대면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더디 크는 것 같은데 나만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활발히 일하는 꿈속의 여인은 아련히 멀어져 갔다.
물론 나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에 온전하고 싶었다. 다만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쯤 되면 이제 육아에 손을 털리다. 마치 세 딸과 동지애를 불태우듯 서로를 응원하며 각자의 땅을 개척하고 기경해 가리라’라고 생각했다. 늘 내가 정한 유예기간을 가슴 깊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다 보수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유아교육 강의를 듣는 일이나 다른 강연들을 듣는 일들이 있었다. 그럴 때면 강사님들을 보며 ‘저 자리가 내 자리여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종종거리며 아이들과 이러고 있네.’라는 마음이 부글거렸다. 아가씨 때부터 경영에 대한 야심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교육에는 마음이 많았다.
현장에 계시는 원장님들이나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고 나면 데이터를 분석하듯 개인적으로 질문을 했었다. “교수님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셨어요?” 아이를 낳고 딱 한 달 쉬어봤다는 분도 만나보았다. 출산 후 한 달이 산후조리가 다이고 여태 쉬어 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양가 어머니들이나 누군가가 육아전담을 해주셨다는 이야기들이 거의 대부분이셨다. 그런 날이면 ‘다 가질 순 없어. 선택인 거야. 무엇 하나는 놓아야 하는 거지. 네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했잖아.’ 하면서 내면의 나와 대화를 해야 했다.
이렇게 때때로 잠자고 있던 갈증이 일어나 소용돌이가 되어 흔들다 지나갔지만 후회도 없었고 내 플랜에 대한 제고도 없었다. 자투리 시간에 나의 성장을 꿈꾸고 전적으로 아이들과 함께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들을 통해 나는 정말 엄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그때가 되면 나는 또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잘 걸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첫 아이를 안으며 ‘세상의 어느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구나. 누군가에겐 다 이렇게 귀한 자식이구나.’라는 생각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졌다. 이론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깨달음들이 육아의 현장에 숨어 있었다. 알고 있던 교육학적 이론들과 삶의 괴리에서 나만의 답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어른이 되어갔다. 엄마가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 마음도 아는 어른이 된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빠 역할까지 하느라 생활력이 강하실 수밖에 없었다. 언니 오빠가 다 출가하고 엄마와 둘이 지낼 때도 새벽같이 나가시면서 늘 출근하는 나를 위해 아침상을 식탁에 차려 놓고 가셨다. 식탁 위에는 내가 먹을 찬과 숟가락 젓가락이 놓여있었다. 심지어는 빈 밥공기까지 준비되어 있어 따뜻한 밥만 덜어먹으면 되었다. 이런데도 먹는 것을 포기하고 조금 더 자는 게 좋을 때가 많았다. 그런 날은 헐레벌떡 출근 준비를 하고 나가느라 빈 공기에 공갈로 밥풀 몇 개를 붙어서 설거지통에 넣어놓고 가곤 했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해서 국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 남편을 위해 아침잠을 아끼며 아침상에 찌개나 국을 올려 아침밥을 차렸다. 규칙적인 식사를 하지 않았고 아침도 잘 안 먹었던 남편은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3킬로가 늘었고 100일이 되자 10킬로가 쪘다. 입덧이 시작되기 전까지 일 년 반의 시간을 열심히도 아침상을 차렸다. 요리 한번 제대로 안 해본 내가 매일 아침 남편을 먹이기 위해 아침상을 차리는 모습을 보며 엄마를 위한 상을 이렇게 차린 적이 있나 라는 반성이 들었다. 엄마가 새벽에 나가셔도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식탁이 마음에 남아 있다.
보고 배운 대로 한다고 나도 딸들이 아침을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아침상을 차린다. 내 한 몸 추스르기도 벅찼던 여자는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혼자가 아니기에 많은 일들을 해내고 있었다. 엄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니 체력이 방전되어 탈이나 하루 종일 토하고 물도 못 마시는 날에도 아이를 위해 종일 모유수유를 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인생 선배들의 말이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몸이 힘들지만 그게 더 나아. 좀 커봐. 마음이 힘든 시기가 온다니까.” 이게 무슨 블랙홀이란 말인가? 아이들이 어릴 때는 지금 같기만 하겠어. '자고 싶을 때 자고 편히 좀 먹고 싶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씩 아이들의 몸이 자라고 엄마가 몸으로 해줄 것이 적어지자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무엇이 맞는 것인지 묻고 또 물어야 했고 여전히 어린아이 다루 듯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나를 내려놓아야 했다.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몰랐을 그 수고의 시간을 보내고 엄마이기 때문에 깊어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글을 쓰며 우리 아이들이 다시 학교에 가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24시간 육아 모드는 근 반년을 훌쩍 넘어 올해 달력을 몇 장 안 남겨놓고 있었다. ‘아! 혼자 우아하게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여름 방학기간 중에 정말로 그런 황금 같은 며칠이 내게 찾아왔다. 그런데 반전이었다. 엄마가 언제 나가나 기다렸던 중학생 아이처럼 아이들이 집에 없자 해방감을 느낀 나는 정말 풀어져 지냈다. 남편도 회사에서 저녁까지 먹고 오니 삼시 세 끼에서 해방되니 너무 좋았다. 음식과 설거지를 안 한다는 기쁨에 빵과 우유나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웠다.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니 새벽 기상도 내려놓게 되었다. 그 며칠 깨달았다. ‘아이들 때문에 글을 못 쓰는 것이 아니었구나. 아이들 덕분에 생활의 규모가 있었구나. 본이 되기 위해 잘 살려했구나.’
무엇보다 아이들과 24시간 늘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척하며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 척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하는 시간이 적으면 그 시간에 총력을 기울여 잘하면 되지만 함께 늘 있다 보니 여실히 드러났다. 건성으로 넘기던 문제들이나 갈등 상황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면서 뚜렷하게 색을 드러냈다. 사춘기를 맞은 딸까지 등장해 생각이 많아졌다.
처음엔 아이들에게서 문제를 찾았었다. ‘이 친구는 이게 문제구나. 이 딸이 늘 이런 패턴으로 갈등을 일으키네.’ 이런 생각들이 드니 훈계도 많아지고 목소리도 높아져 갔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답이 찾아지지 않자 말을 아끼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하나하나 몸으로 적용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며 답을 찾아가게 되었다.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색들이 어우러져 갔다.
처음엔 왜 이 시기에 글을 쓰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시기여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게 되었다. 이 시기가 있어서, 그냥 지나쳤으면 후에 빙산의 일각처럼 크게 모습을 드러낼 문제들을 직면해서 해결할 수 있었고 척을 내려놓고 글을 쓸 수 있었다. 내가 변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깨닫고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다.
꽃이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있다. 마냥 꿈 많고 예쁘던 꽃은 떨어졌다. 그러나 꽃이 떨어졌기에 그곳에서 열매가 맺힌다. 가장 가치롭고 보배로운 자녀라는 열매가 자라고 있고 척과 겉치레가 빠지는 소박하지만 진실된 열매들이 알알이 맺히고 있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열매 맺어가고 있다.
감꽃이 가득 떨어졌네요. 곧 감꽃이 떨어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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