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혜
[The Psychology Times=김동혜 ]
춘향전에서 성춘향과 이몽룡은 정의롭고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선한 인물이었고 변사또는 약자를 괴롭히는 악인이었다. 마블사의 히어로물에서도 주인공들은 거의 항상 정의롭고 선한 인물로 그려지며 주인공에 대비되는 악역이 함께 등장한다. 이처럼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나 드라마에는 선한 주인공과 악역의 대립 구도가 나타난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도 이러한 선악의 대립 구도가 나타날까? 다시 말해, 현실 세계의 사람들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뉠 수 있을까? 독일의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이 질문에 “No”라고 답한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모든 인간이 악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악의 평범성(benality of evil) 개념을 제시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악’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lessness)로부터 발생하며 무사유는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특성이다. 즉, 악의 평범성이란 ‘악’이 특정 악인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모든 평범한 인간에 의하여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위가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악행을 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이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아이히만은 극악무도한 악마와 같다. 그러나 악의 평범성 논리에 따른다면 아이히만도 보통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로 그는 유대인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사유하지 않았을 뿐이다. 친위대에 가입할 때, 자신에게 유대인 학살 업무가 주어졌을 때 그는 그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실험: Milgram의 복종실험과 Asch의 동조실험
악의 평범성이 나타나는 심리적 과정은 Milgram의 복종실험과 Asch의 동조실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Milgram의 복종실험은 평범한 사람이 권위에 굴복하여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실험의 참가자는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을 가하고 충격의 강도를 점점 높이라는 지시를 받는다. 전기충격 기기는 가짜였고 학생 집단도 섭외된 연기자였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실험 참가자들은 지시를 따르는 데 큰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지시를 따르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모든 실험 참가자가 학생에게 전기충격을 가했으며, 약 65%의 참가자는 인간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강도인 450V의 충격을 줄 때까지도 실험자의 지시에 따라 계속해서 전기충격의 강도를 높였다. 이와 같은 실험 결과는 악에 복종하게 만드는 권위의 힘을 보여준다. 평소 합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평범한 사람도 권위 있는 명령에 노출되는 상황에서는 악에 굴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Asch의 동조실험은 다수 집단에게 동조하는 인간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 실험은 7~9명의 피험자가 모여 진행된다. 실험 참가자들은 서로 길이가 다른 세 개의 선분 A, B, C 중에서 기준이 되는 선분인 X와 길이가 같은 것을 고르도록 지시받으며, 이는 18회 반복된다. 그런데 7~9명의 피험자 중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전에 섭외된 실험의 협력자이다. 협력자들은 초반의 시행에서는 모두 정답을 말하다가 특정 시행에서 의도적으로 동일한 오답을 말하도록 지시받는다. 실험 결과 협력자가 아닌 피험자들 중 약 75%가 적어도 한 번은 다수의 오답에 동조하였다. 심지어 약 36%의 피험자는 다수 집단이 오답을 말할 때마다 매번 오답에 동조하였다. 이처럼 인간은 다수의 의견이 틀렸음이 명백한 상황에서조차도 다수 집단에게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평범한 사람도 악행이 보편화된 다수 집단에 둘러싸여 있다면 그것에 동조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 실험은 사유하지 않고 쉽게 복종하며 쉽게 동조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어떤 한 사람이 악인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이 타고나길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다. 그저 우연히 악에 노출되었고 그 상황 속에서 주체적인 사유를 멈춘 채 악에 복종하고 동조했기 때문이다. 즉, 악인이 될 사람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사유하지 않는 순간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악이 만연한 상황 속에서도 무조건적인 복종과 동조를 경계하며 결코 사유하기를 멈춰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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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Hannah Arendt. (2006).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김선욱 역). 한길사.
조나영. (2016). 한나 아렌트(H. Arendt)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한국여성신학, (84), 189-196.
Asch, S. E. (1956). Studies of independence and conformity: I. A minority of one against a unanimous majority. Psychological monographs: General and applied, 70(9), 1.
Milgram, S. (1963). Behavioral study of obedience. Th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67(4),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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