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The Psychology Times=이소연 ]
후배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남편이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이야기가 있다.
와이프가 나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싶다고 했어, 그것도 결혼 초에
때는 결혼 5년 차, 남편은 아팠고 아이도 아팠다. 원치 않는 귀촌을 했고 직장을 잃었고 결혼 후 생활비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아파서 짜증을 내었고 먹고 싶은 것을 못 먹게 해 분노했다. 생활비는 내가 벌었고, 먹을 것은 친정에서 조달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픈 것은 죄'라고 배웠다. 건강관리를 스스로 하지 않아서, 나쁜 것들을 실컷 탐하고 아픈 것은 죄다. 왜 아픈지 공부하지 않은 것도 죄다. 자기 몸에 사용하는 약물에 대해 공부하지 않은 것도 죄다. 무지는 죄다. 물론 나도 완벽하게 건강하지는 않다. [먹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나 자신을 파괴했고, 내 몸을 조각내 놓았다. 그리고 그 과정은 남편의 병과 아주 똑같았다.
결혼 전, 나는 아프지 않기 위해 공부했었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시도했다. 심지어 직업도 포기했다. 사실 결혼은 포기한 직업에 대한 부산물이었다. (먹고 살 길도 공부할 돈도 없었으므로) 나는 남편의 병을 내가 겪은 과정과 똑같이 이겨내도록 이끌었다. (내 결혼의 동기가 불순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남편은 당연히 반항했다. 하지만 그와 나는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가 아닌 가족이었기에 극도로 감정적이었다. 그는 내 방식을 신뢰하지 않았고, “나는 아픈 사람이니까 내 멋대로 할거야!”만 남은 외동아들이었다. 상황을 객관화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접근하기보다 “니가 내 상태를 어떻게 알아? 내가 얼마나 아픈 줄 알아?”라는 정서적 호소만 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니 위로해 달라는 약해빠진 마음만 있었다. 만난 지 4개월 만에 결혼하자마자 이 난리가 났으니 깊은 정이랄 것도 없었다. 엄마처럼 불쌍한 아들 껴안아주듯 위로만 하고 있기에는 내 인생의 앞길이 막막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어떻게 하면 다 같이 죽을 수 있을까 상상했다. 먼저 남편을 어떻게 처리할까, 그리고 어차피 망친 내 인생은 어떻게 끝낼까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계획했다. (죽은 후의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은 죽는 것조차 나의 탈출구가 되지 못한다. 빌어먹을 인생이다.) 물론 당시에는 남편에게 이런 마음을 직접적으로는 얘기하지 않았다. 우울과 공황상태였던 남편에게 이 말들이 독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상상은 날이 갈수록 더욱 구체적이 되었다. 억누르고 억누르던 나의 분노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선택적 포기를 선언했다. 그를 본가로 돌려보냈다. 아주 차분하게, 웃으면서 잘 가라고 했다. 깊이 생각해보라고 했다. 아프다고 분노하며 날뛰기를 멈추고 생각해보라고 했다. 신에게 분노해봐야, 가족에게 신경질 내봐야 상황은 나아질 것이 없었다. 문제를 직시하고 같이 차근차근 노력할 준비가 되면 돌아오라고 했다. 짧게는 10년, 완벽하게는 20년이 걸릴 것이라고. 그 시간을 인정해야만 너는 어른으로 살 수 있다고. 내가 부모처럼 너를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도 살기 위해 너를 고치고자 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가 함께 사는 시간이라고. 그것이 결혼이라고. 몇 개월을 기다려도 준비가 되지 않으면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헤어질 절차를 밟을 것이라 통보했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한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였다.
스스로를 직면하는 것
남편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병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었다. 병명의 정의가 무엇인지, 원인은 무엇인지, 병을 나은 사람들의 사례는 어떤지. 병원에서 약을 먹으라면 먹었고, 특정 음식을 먹지 말라면 그것만 빼고 나쁜 것을 다 먹었다. 자신의 인생을 남이 살도록 한 것이다.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질 의지가 없었다. 원리도 지식도 모른 채 부모님이 시키는대로만 했고, 낫지 않으면 부모님 탓을 했다. 문제는 병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이는 단순히 병에 대해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책 한 권, 전자제품 하나를 사더라도 똑똑한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다. 결과적으로 잘못 구매하면 물어본 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면 편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새로 샀다. 작은 물건을 소비하는 행위에도 ‘나’가 없었다. 남이 좋다는 것을 샀고, 그러니 스스로 만족해본 일은 없었다. 자기 인생에 자기 기준이 없었다.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고 1-2년이 지난 후, 아주아주 조금씩 자기 인생을 찾아가고 있을 즈음 그 때 얘기를 했다. 그 때의 나는 너를 죽이고 싶었다고.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다 망쳐버리고 싶었다고. 남편은 충격적이라고 했다. (어째서?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었는데) 그런 마음은 이삼십년 같이 살았을 때 쯤 생기는 마음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장 미안하고 가슴 아픈 것이 첫째 아이다. 그때 아이도 많이 아팠다. 그럼에도 분노가 가득 차 있는 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곤 했었다. 그 시기의 정서적 안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가 시리도록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나를 다스리지 못했다. 그때는 힘들었으니까, 는 핑계가 되지 못한다. 나는 어린 시절 힘들었던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고, 그래서 그 결과가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의 엄마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같은 일을 반복한 나 스스로는 아직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애쓴다. 첫째가 하고 싶다는 것들을 마음껏 하고, 즐겁게 살고 싶었으면 해서다. 돈이 없어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하고 싶었던 공부를 아직도 못하는 내 인생을 또다시 번복할까 두렵다.
지금도 삶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다. 건강은 아직도 우리를 힘들게 한다. 사업은 성장하다 내 임신 출산으로 멈춰 서고, 성장하다 코로나로 멈춰 서고 무한 반복이다. 어떻게 하면 다 같이 죽을 수 있을까를 상상하던 때에 비하면 매출은 20배 정도 되지만 체감상으론 아직도 쉽지 않다. 구멍가게를 벗어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으로 만들기 위해 투자도 20배는 더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금 더 웃으면서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막내 둘째가 건네는 말들이 있어서다. 나를 맴돌다, 오래 기다려서 태어난 아이는 눈 뜨는 것이 즐겁고 입에 넣는 모든 음식들이 행복하다. 가끔 아프면 화를 버럭버럭 내며 소리를 꽥꽥 지른다. 맛있는 것 먹으러 왔는데 대체 이게 뭐 냔다. 그래서 웃게 된다. 내가 어쩌다 여기 태어났는지, 괴로울 걸 아플 걸 알면서 왜 왔는지 문득문득 생각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 맛있는 것 먹으러 왔지. 엄마한테 어리광 부리러 왔지. 서로 웃는 얼굴 보려고 왔지.
그곳은 그런 곳이다. 아프지도, 맛있지도,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황량한 곳. 무한이 존재하는 곳. 그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요즘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서보기 위해 하루 수 권의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아이가 내게 건네는 말들을 해보기 위해. 네가 어른이 되기 전에 좀 더 잘 설명해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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