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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신치 ]


1989년의 어느 밤

남동생이 태어난 해에 우리 가족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집에서 나와 새로운 집으로 독립을 했다. 이사한 후 남동생이 갓난아기인 동안은 부모님이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 같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밤 나는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무슨 소리인지 듣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였다. 



학교를 다니기 전이었던 나는 처음 듣는 온갖 욕설로 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엄마를 때리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해가 떠 있을 때도 가끔 엄마와 아빠가 싸우긴 했지만, 주로 엄마가 아이들 보는 앞이라고 말렸기 때문에 싸움은 일단락이 되곤 했다. 하지만 동생 둘과 나, 세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에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격하게 싸우고 있었나 보다. 처음 듣는 소리에 온 몸은 긴장되어 쪼그라들었고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한쪽 뺨을 베개에 두고 양 두 손으로 구부린 두 무릎을 감싸 안아 온몸을 움츠린 채 이불속에서 계속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잠이 들었다.


불행하게도 그 날은 시작에 불과했다. 같은 소리에 자주 깼고 잠에서 깨는 날마다 늘 이불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울었고, 다음번에는 아빠한테 당하고 있는 엄마가 불쌍했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나 자신이 참으로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의 부부싸움에 아이들이 깨어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땅거미가 깔린 이후에만 심해지던 싸움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3년의 어느 날

나에게 가장 행복한 날은 ‘아빠가 집에 없는 날’이었고, 우리 가족에게 평화가 찾아오는 날도 역시 그랬다. 내 속에 쌓이던 답답함과 분노를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보내던 표현은 아빠가 없는 틈을 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엄마, 제발 아빠랑 헤어지면 안 돼? 난 엄마 따라갈 거야.”


언제나 절정이었지만, 특히 그날은 부부싸움은 절정에 이르렀던 날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아빠의 언어적 그리고 물리적 폭력성이 절정에 달한 날이다. 엄마는 큰 가방을 꺼내어 아이들의 옷을 챙겼고, 아이 셋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바로 기차역으로 갔고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목포에 있는 어느 보육원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어머니가 있는 아이들은 이곳에서 지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갈 곳이 없던 우리에게 하루 밤의 잠자리를 허락해 주셨다. 그 하룻밤은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아버지가 없는 곳에 있다는 안도감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결국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을 두려워하며 긴장해야 하는 곳, 아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1998년의 어느 여름 오후

중학교 2학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와 교복도 벗지 않은 채 집에 있었다. 그날도 예고 없이 싸움이 시작되었다. 욕설이 난무했고, 폭력이 시작됐다. 십여 년 동안 가슴속으로 삭히며 차곡차곡 쌓아 온 분노가 어느새 머리끝에 가 닿았다. 말없이 울기만 하던 나는 사라졌고, ‘매일매일 아빠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십 대 소녀’의 손에는 주방에서 꺼내 온 식칼이 들려져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끓고 있던 분노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아빠를 죽여버리겠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다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


그렇게 나는 식칼의 끝을 아버지에게 겨누고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빠를 죽이고 나도 죽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엄마가 내 손에서 칼을 빼앗아 갔고, 나를 멈추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쌓아온 분노와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우리 가족에게 이 장면은 ‘없는 장면’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 가족이란 주제로 글을 쓸 일이 있어 내 기억의 한편에 너무나 또렷하게 새겨져 있던 이 장면을 ‘글’로 옮겨 적었고, 방학이 되어 나는 그 글이 담긴 소책자를 집으로 가지고 갔다. 엄마가 가장 먼저 읽었고, 엄마는 아빠에게 ‘읽어보라’며 책을 건넸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도 그에 대해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


2003년의 어느 봄

지방에 있던 나는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지낼 수 있었다. 1년에 두 번, 명절 때나 겨우 가족들의 얼굴을 보았다. 대학교 3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봄날이었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학교에 왔다는 것이다. 급하게 뛰어나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와 그다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기에 반가운 얼굴을 할 수도 없었다.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내가 던진 말은 그게 전부였다. 아빠는 내게 부끄러운 존재였다. 누가 볼까 싶어 아버지를 얼른 학교 밖으로 모시고 나갔다. 학교 앞의 자취방에 아버지를 모셔다 놓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라고 얘기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바쁠 테니 먼저 돌아가겠다’는 문자만 남기고 떠나 있었다.


2005년 봄

모임이 있어 지하철 7호선을 타고 가는 길이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돌아가셨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 고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에는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아버지는 모험심이 굉장히 강한 분이었다.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에는 친구들과 만든 뗏목을 타고 낙동강 줄기를 내려온 적도 있다. 엄마와 결혼하기 전부터는 할아버지 회사에서 영업을 담당했다. 첫째인 내가 돌이 막 지났을 때 교통사고로 여러 차례의 뇌수술을 받았다. 몇 년 후에 일어났고 한쪽 다리를 절었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활동적이었던 아버지가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우울증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우울증은 폭력성을 더욱 키웠고, 시시때때로 폭주하는 폭력에 가족들은 지쳐갔다. 아버지가 하는 유일한 사회활동은 대학 공부를 할 때 만들어진 부부 모임이었고, 장례식장에 찾아온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들 역시 그분들이었다. 장례식장이 북적거리고 남은 가족들이 웃는 모습을 보여줘야 떠나는 사람이 안심하고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많은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첫날밤부터 정말 많은 지인들이 찾아와 주었다. 서울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친구와 선후배들이 달려왔다. 찾아온 이들과 웃고 떠들고 있는데, 한 선배가 내게 말했다.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아빠의 소식을 듣고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장례식장에 있는 아빠의 영정사진을 보고 그리고 관 속에 들어가기 전 아빠의 몸을 생에 마지막으로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왠지 모를 미안함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아, 이제 아빠 없는 우리 가족에게 평화가 찾아오겠구나.’하는 안도감과 ‘떠난 아빠는 안타깝지만, 남은 가족에겐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아빠를 떠나보냈다.


2012년 어느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 남동생은 평생을 살았던 집을 떠나 서울로 왔고, 네 가족이 모여 살았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각자의 인생을 위해 떠난 후 엄마와 단 둘이 서울에 남았다. 2010년 5년간 다니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스타트업이었던 두 번째 직장은 투자를 유치하지 못해 월급을 못 받는 상황이 되어 5개월 만에 그만두었고, 두 번째 직장에서 영업을 하던 중에 만난 대표님과 함께 일하게 된 세 번째 직장은 회사의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4개월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신촌에 있는 어느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이 서른. 번듯한 직장에서 자리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와 불안정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나는 입만 열면 서로를 향한 가시를 뿜어댔고 그 가시는 방패 없이 그대로 서로의 가슴에 박혔다. 엄마의 자식에 대한 기대와 잔소리로 매일매일 숨이 막혔다. 그때 처음으로 


‘아. 아빠가 참 힘들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할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못하게 된 아버지는 과일 장사, 택시 운전 등 다양한 밥벌이를 시도했지만 끈기 있게 오래 하지 못했고 그런 아빠를 향해 엄마는 자주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도대체 돈은 언제 벌어올 거야? 뭘 꾸준히 하는 걸 못 봤어.”


그런 잔소리에 결국 아빠는 폭발했고, 엄마에게 욕을 퍼부었으며, 폭력으로까지 이어졌다. 어떤 상황에도 폭력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후 몇 년까지도 100% 엄마 편이기만 했던 내가 어린 시절의 ‘아빠처럼 제대로 돈도 못 벌어 오고 번듯한 직장도 없이 알바나 하는 그런 신세’가 되고 겪는 엄마의 잔소리 폭격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이러다가 정말 엄마와 나 둘 다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독립을 결심했다.


2015년 어느 가을.

추석 연휴였다. 아버지 제사 준비를 하기 위해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갔다. 제사 준비를 하면서 아빠 영정사진을 꺼내 들었다. 문득 2003년의 봄에 찾아온 아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서울로 나를 찾아온 아버지에게 왜 그리도 쌀쌀맞게 굴었을까.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던 아빠. 엄마를 비롯해 자식 3명 중 누구도 아빠 편이 아니었다. 모두가 엄마 편이었다. 아빠의 폭력성 이면에 숨어 있던 한 인간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엄마와 웃으며 대화하다가도 아빠가 나타나면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이 가득한 싸늘한 표정으로 늘 아빠를 대했다. 이십여 년을 그렇게 외롭게 살았던 아빠였는데, 돌아가신 그날도 그 외로움을 알지 못했고, 돌아가신 이후에도 알지 못했다. 내게 우울증이 찾아온 그때조차 아빠의 외로움은 알지 못했다. 


뼛속 깊은 외로움


아버지가 평생 가지고 살았던 그것을 처음으로 이해했고, 그리고 생전에 아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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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7-26 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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