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경
[The Psychology Times=신선경 ]
왜 당신은 내게 돌은 던졌나요?
'환향녀(還鄕女)'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21세기 우리나라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단어는 잊혀진 역사의 아픔과 한이 스며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돌아올 환(還)에 고향 향(鄕) 여자 녀(女)가 합쳐진 이 단어는 병자호란 이후 고향으로 되돌아온 여성들을 일컫습니다. 당시 환향녀라고 또는 속환녀라고 불리었던 여성들의 삶은 참으로 기구했습니다. 그들은 원치 않게 가족들과 생 이별하여 타국에 끌려가 고된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매일 저녁 자기 전 내일 아침은 내가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는 하루를 살아야 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나날을 버티고 버티다 죽지 않고 가족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돌아오면, '더럽혀진 여성'이라며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일로 인해 같은 고향 사람들에게 돌을 맞기 일수. 심지어 가족들에게 수치로 여겨져 그들 중 상당수는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비수보다 아픈 말들로 인해 자신의 생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병자호란의 가슴 아픈 피해자들은 본국에 돌아와 그들의 아픔을 위로받지는 못할 망정 같은 고향 사람들에게 속절 없이 가해자 취급을 받으며 또 한 번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습니다. 왜 피해자들이 잘 못하나 없이 가해자가 되어야 했을까요? 또 다시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 답을 명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당시 조선의 백성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라거나, 그 당시 사람들이 무척 못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이라고 해서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지금보다 정도 많고 이웃간의 애(愛)도 가득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그들은 같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돌을 맞아야만 했던 것일까요? 그들의 가족들은 왜 감싸주지 않은 것일까요?
나 역시 돌을 맞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그 이유는 '자아방어기제'를 통해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자아'란 내가 세상과 반응하며 상호작용하는 개인의 부분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나'라고 인식하는 특성들을 바로 자아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자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다양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개인의 욕구가 무엇인지 형성하거나, 이를 실현하거나, 윤리와 욕구 간의 괴리를 중재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러한 갈등이 극심하게 발생해 불안이 야기되었을 때, 이러한 불안을 내재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사고나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 그것을 바로 '자아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즉 불안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비상 전략을 바로 자아방어기제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아방어기제는 내면의 성숙도와 불안의 수준에 따라 그 정도와 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당시 환황녀들에게 보였던 백성들의 태도가 바로 그 중 하나인 '투사'입니다. 이러한 투사는 일명 '남탓하기'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요.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기거나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 즉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나의 슬픔, 분노 등의 부정적 감정의 이유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가질 불안이나 죄책감으로 부터 일시적으로 회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환향녀들이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청과의 싸움에서 조선이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아있던 조선의 백성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청에 포로로 갔던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던 이유가 '조선'이라는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공동체 '외부'라고 인식되어지는 청으로 부터 돌아온 환향녀들을 다시 한 번 핍박하며 고통을 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모두가 '돌'과 멀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나 부터'의 자세가 필요
이러한 자기방어기제는 인간의 정상적 반응으로 불안을 극복하게 하고 실패에 대처하게 하는 아주 좋은 생존 전략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도하게 부풀려 지거나, 자아의 방어 그 이상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상대방과 나 모두를 아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내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언 발에 오줌누기'일 뿐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방어기제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보다, 다수들이 동일한 죄책감을 느끼고 이를 소수에게 전가하고자 하는 경우 투사는 굉장히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때 사람들은 '다수'라는 함정에 빠져 '투사'와 함께 '정당화'를 통해 자기를 방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환향녀'역시 조선의 백성 전체가 환향녀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한 사람 또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면, 오히려 환향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던 소수를 이상한 사람들로 취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백성 다수가 환향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자인 환향녀들을 가해자로 설정하는 '투사'를 '정당화'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환향녀들은 2차 가해를 겪게 된 것입니다. 이들 뿐 아니라 '위안부' 역시 민족의 자기방어기제에 의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 부터'의 자세입니다. 나 부터 그 사건에 내가 가지고 있는 잘못은 없는지, 그 잘못을 내가 타인에게 전가하며 단순히 현재의 고통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방어기제가 매혹적인 수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미봉책일 뿐입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당신의 마음 속에 있으니까요.
평소에 저희가 겪은 대부분의 '투사' 현상은 굉장히 사소하고, 어쩔 때는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러한 회피 현상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해 왔는데요. 최근 환향녀와 위안부분들께서 겪은 2차 가해를 찾아보며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하게 나의 '투사' 행위를 방관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정도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데, 너무 사소한데 뭐 어때'라는 마음으로 진정 내 잘못을 짚지 않은 채 넘어가는 것이 한 두 번 쌓이다보면 내가 가진 근본적 문제는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 채 언젠가 타인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의 안일함으로 내가 구할 수 있는 어떠한 생명들을 놓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이 다시 한 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셨으면 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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