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혜
[The Psychology Times=김동혜 ]
세상은 합리적인가?
‘권선징악’,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와 같은 오랜 격언들은 착하게 살고,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이 격언들이 전하는 교훈은 사실일까? 당신의 경험을 떠올려보라. 착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고,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은 모두 벌을 받았는가? 노력한 사람은 마땅한 성과를 얻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가?
씁쓸하게도 현실에는 착한 사람은 힘들게 살아가고, 나쁜 사람은 승승장구하는 일도 많다. 또한 노력이 언제나 보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으며, 노력 없이 보상을 받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앞의 오랜 격언들은 모두 세상이 합리적이라는 전제하에 사실이 될 수 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세상은 항상 합리적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유 없는 행운이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유 없는 불행이 삶을 덮치기도 한다. 이유 없는 행운은 이유가 없기에 더 행복하다. 그리고 이유 없는 불행은 이유가 없기에, 더더욱 고통스럽고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이유 없는 불행이 남기는 상처, PTSD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불행은 흔히 PTSD라고 불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는 충격적인 외상 사건 이후 다양한 심리적인 부적응을 나타내는 장애이다. 이때 충격적인 외상 사건에는 죽음, 심각한 상해, 성적인 폭력 등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는 것, 가까운 주변인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모두 포함된다.
외상 사건은 너무나도 충격적이기에 사건이 종료된 이후에도 오랜 기간 삶에 영향을 미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침투 증상과 자극 회피, 인지와 감정의 변화, 각성과 반응성의 변화 등으로 고통 받는다. 플래시백(Flashback)이라는 익숙한 표현으로 알려진 침투 증상은 외상 사건과 관련된 기억이 갑작스럽게 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증상을 말한다. 과거의 사건이 계속 떠오르면서 심리적인 고통을 유발하며 사건이 현재 실제로 발생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건에 대한 기억은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PTSD 환자들은 사건과 관련된 자극을 회피한다. 예컨대, 교통사고로 심각한 신체적 상해를 입은 사람은 공포감으로 차를 타는 것을 회피할 것이다. 이것이 자극 회피에 해당하는 사례이다.
외상 사건은 인지와 감정에도 변화를 유발한다. 사건의 일부를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신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외상 사건은 “합리적인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PTSD 환자들은 ‘세상은 위험한 곳이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야. 나는 영원히 회복할 수 없어’와 같은 비합리적인 신념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또한 환자들은 각성과 반응성에서도 변화를 보이는데, 주의집중을 잘 하지 못하며 사소한 자극에도 크게 놀란다. 감정 조절에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흔하고 수면 장애를 동반하기도 한다.
이유 없는 불행이 고통스러운 이유: 박살난 가정 이론
PTSD를 설명하는 이론 중 ‘박살난 가정 이론(Theory of shattered assumptions)’은 이유 없는 불행이 고통스러운 이유를 설명한다. Janoff-Bulman이 처음 제시한 이 이론은 이름 그대로 외상 사건이 개인이 원래 가지고 있던 가정(assumptions)을 박살냄으로써 고통을 유발한다는 이론이다. 일상에서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저에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신념이 있다. 세상은 합리적이고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나는 소중한 존재로서 존중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런데 외상 사건은 이러한 신념을 박살낸다. Janoff-Bulman에 따르면 특히 세 가지 신념이 외상 경험에 큰 영향을 받는다. 첫째는 세상의 우호성에 대한 신념으로, ‘세상은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이며, 사람들은 따뜻하고 우호적이다’와 같은 신념을 말한다. 둘째는 세상의 합리성에 대한 신념이다. ‘세상은 합리적이고 공정하다’, ‘모든 일은 예측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와 같은 신념이 이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신념이다. 이는 ‘나는 소중한 존재이며 무가치하게 희생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신념을 말한다.
외상 사건은 이 세 가지 신념을 완전히 깨뜨린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사람에게 세상은 더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다. 사람도 쉽게 믿어서는 안된다. 언제 불행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항상 경계해야 한다.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의식은 이미 희미해졌고, 언제든 또 끔찍한 사건이 나를 다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기존의 신념이 붕괴되는 과정은 극심한 심리적 혼란과 고통을 유발한다. 그리고 부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념이 자리잡은 뒤에는 우울감과 무기력감이 삶을 지배한다.
세상은 비합리적인가?
이유 없는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을 회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세상의 위험과 비합리성과 사람들의 악랄함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한 긍정적인 신념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믿음일 뿐, 엄밀히 말하자면 참보다는 거짓에 가까운 명제들이다. 실제로 세상이 항상 안전하지는 않고, 항상 합리적이지도 않다. 또 모든 사람이 우호적이지도 않으며 모두가 우리의 가치를 존중해주지도 않는다. 이처럼 현실에는 긍정적인 신념에 대치되는 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이 긍정적인 신념을 갖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은 비합리적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기에 세상에는 합리적인 일들도 너무나도 많다. 세상이 항상 안전하고 합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는 안전하고 합리적이다. 모두가 당신에게 우호적이고 당신을 존중해주진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이유 없이 당신을 적대시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때때로 비합리적이지만 대체로 합리적이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보다는 예측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다.
물론 한 번 이유 없는 불행을 겪었다고 해서 앞으로 어떤 고통도 없을 거라 말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불행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없다. 원망스럽게도 그냥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모든 일에 원인이 있지는 않다. 그냥 일어나는 일도 있다. 따라서 그냥 들이닥치는 불행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유 없는 불행보다 이유 있는 행복이 더 많다.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세상의 합리성을 믿고 살아간다면, 이유 있는 행복으로 삶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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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권석만. 2013. 현대 이상심리학. 학지사.
Janoff-Bulman, R. (1989). Assumptive worlds and the stress of traumatic events: Applications of the schema construct. Social cognition, 7(2),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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