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웅재
[The Psychology Times=나웅재 ]
▲ pixabay
평소 독립적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다. 독립적이라고 하면 흔히 어떠한 행위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비슷한 의미로 막 20대를 시작한 내가 그랬듯이 독립적이라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도 있다. 대학에 막 들어간 새내기 시절은 집과 학교 사이를 통학했다. 그것도 금방 질려서 2학기부터는 2인실 기숙사에 들어가 살게 되었지만 생활패턴이 맞지 않은 룸메이트와 다툰 후 바로 나왔다. 2학년은 아예 혼자 살아보겠다고 자취를 했으며 고향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군 복무를 한 뒤에도 새로운 대학을 가게 되어 다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홀로 자취를 하며 대학을 다녔다. 20대가 되고 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낸 것이다.
단순히 먼 곳에서 혼자 오래 살아봤다고 해서 독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결정을 내리고 어떠한 생각을 말할 때 외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남들은 안된다고 하거나 말리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할 것이라고 통보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되어 크고 작은 성공 경험이 되기도 했고 나름대로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내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나간다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인간은 살면서 항상 좋고 행복한 경험만 할 수는 없다. 힘든 일이 있어도 스스로 꾹 누르며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감정 전염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름의 삶을 살고 있는 타인에게 나의 부정적인 경험이나 생각을 전해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불현듯 오랜 시간 참아온 상처가 곪으려 하자 견디지 못하고 외부의 세계에 도움을 요청하려는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내 연락을 반갑게 받아주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행위는 누구나 하는 보편적인 행동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냥 좋게만 해석될 행동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름 미래를 위한 결정이랍시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과 동기들과 연락을 오랫동안 안 한 적이 있었다. 중간중간에 연락이 오는 그들은 종종 나에게 서운함을 토로했지만, 그들이 나의 생각과 행동을 존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답답해했었다. 오로지 내가 세운 목표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고 그것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경험이나 감정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뒤에도 이러한 성향은 타성에 젖어서 잘 고쳐지지 않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나의 방식이고 무조건적으로 존중받기를 바랐었다. 나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도 그들이 헌신했던 과정은 잊힌 채 미래라는 불확실한 잣대로 판단되어 어느 순간 회피 동기가 되어버렸다.
관계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형성되고 지속되지 않는다. 이것은 형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관계든 오랜 시간이 지난 관계든 모두 해당된다. 한쪽이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더라도 상대방이 관계 맺지 않으려 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오해와 의심이 생길 것이고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그러한 부분에서 내 안위만을 생각한 이기적인 태도는 관계를 지속하고자 용기를 내었던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스스로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각한 뒤에는 이미 주변에 상황들이 많이 바뀐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노력을 기울였다면 지속되었을 관계들은 끝나있었고, 먼저 연락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도 많이 남지 않았다. 아직 길게 살지 않은 삶을 돌이켜볼 때도 내가 행복했다고 느끼는 순간들에는 항상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 때로는 내가 그들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기억 그 자체만으로도 큰 만족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주변의 작고 사소한 관계들이었고 그들이 베풀어준 작은 애정과 관심 덕이었지만 이 말을 이해할 만큼 내가 성숙해졌을 때 그들은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로소 타인의 소중함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들이 남기고 간 이별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미안함과 죄책감에 목 놓아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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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까지 나를 잊지 않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러한 관계를 지속하고자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처음 만나는 타인이나 짧게 만나는 상황에서도 최대한 유쾌하게 행동하며 많이 웃고 새로운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타인이 나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삶을 살아왔다면 반대로 내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영감을 주는 삶을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타인과 내가 만나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기적에 가까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약 80억이라는 인구 중에서 51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대한민국에서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중에서도 하필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학교를 다니거나 같은 수업을 듣고 활동을 하게 될 확률은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서로를 알아갈 순간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주어진 현재뿐이다. 어쩌면 타성에 젖어 무기력하게 흘러갈 지금 이 순간이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이어질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나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입히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주변 환경은 벗어날 필요가 있다. 본연의 내가 견디지 못할 정도로 희생하면서까지 남에게 맞춰서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굳이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며 한정된 에너지를 쏟기에는 우리의 삶은 유한하며 나에게 고마운 사람에게 그런 에너지를 쏟기에도 부족하다.
선택과 집중을 더 해보자는 것이다. 평소 나에게 소중한 존재였던 사람과 관계가 서먹해지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관계를 미루게 될 때가 있다. 어쩌면 더욱 긍정적인 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그 인연에 용기를 내어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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