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실연, 그 후
선영(공효진)과 재훈(김래원)은 같은 직장 동료이면서 똑같이 실연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파혼을 한 재훈은 맨 정신으로 견디기 힘들다며 매일 꽐라가 된다. 취중에 이리저리 전화해서 울고불고, 주사를 부린다. 사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취중에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은 묘하다. 내가 마시고 취하면 괜찮은데, 다른 사람이 마시고 취한 모습을 보면 그 사람뿐 아니라 술도 싫어지려고 하다. 내게는 당분간 금주를 권하는 영화라고 하겠다. 쿨럭.
선영은 (아마도) 전 직장에서 상사와 소문 탓에 재훈이 다니는 회사로 이직을 했다. 전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 사내 연애를 할 경우에 사귀는 게 알려지고, 두 사람이 헤어지면 여자가 이직을 하는 모습을, 여전히 보여준다. 연애 경험이 쌓이면서 선영은 섹스를 잘해서 헤어질 때 남친에게 '걸레'라는 소리를 듣는다. 요즘에도 이런 단어를 쓰는 남자가 있고, 듣는 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맞받아치지만 마음속으로 상처 받는다. 선영은 대차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막말 발사를 장전하고 필요할 때마다 쏘아대지만 연애의 흔적들이 사랑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사랑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남자는 다 똑같다고. 이직한 직장에서도 선영의 연애사에 대한 소문이 돌아다닌다. 남의 연애사를 가십거리로 만드는 동료들의 집단행동에 정면으로 맞서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다. 선영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사랑에 대해, 남자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더 견고하게 다진다.
재훈은 결혼을 앞두고 대출까지 받아 신혼집을 얻었다. 알콩달콩한 신혼을 꿈꾸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던 집에서 여자 친구의 부정을 직접 목격한다. 술 없이 못 살 거 같다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재훈은 술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나올 생각도 없지만 사랑이라는 지푸라기를 놓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믿는 로맨티시스트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고,
평생 서로 바라보면서 같이 늙어가는 것,
그게 인생에서 진짜 행복한 거 아니니?
재훈이 선영에게 한 말이다. '가장 보통의 연애'이지만 100세 시대에 '가장 환상적인 연애'가 아닐까.
사랑을 믿지 않는 여자와 사랑을 믿는 남자의 만남
두 사람의 케미는 취중에 점점 발전하고 드러난다. 두 사람 다 술이 몹시 필요하고, 묻어야 할 과거가 있지만 맨 정신으로 해 낼 수 없다. 술을 마시면 두 사람은 과거의 파편을 툭툭 털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또 가끔 슬그머니 서로의 어깨를 빌리고, 빌려준다. 취했으니까. 이성을 제압하고 본능을 끌어내는 술의 힘이 엄청난 건 사실이지만 술의 힘, 즉 우연에 모든 걸 의존하는 게, 나는 마뜩잖다.
재훈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파혼 이유를 선영에게 말하고, 선영은 사랑을 믿지 않는 이유를 재훈에게 말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화학반응이 일어나면, 어떤 비합리적인 말을 해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재훈과 선영은 사랑에 대한 관점은 다르지만 실연의 아픔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서로 공감한다. 사람은 다 달라서 사랑하는 모습도 다 다르다.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주춤거리는 모습과 망설이는데 보내는 시간의 양도 다 다르다. 절대로 사귈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사람이 근무 시간 외에 만난다. 그것도 자꾸 만난다. 욕까지 섞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디스 잔치를 벌이다가 두 사람이 눈이 맞을 수 있을까.
단점을 자꾸 지적하는 거, 이것도 관심일 수 있다. 첫눈에 반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의 몫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꾸 부딪치며 싸우다가 어느 날, 놀란다. 내가 그 사람에게 왜 신경을 쓰지, 하고. 좋아하는 감정은 자신도 알아차리기 힘들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랑이 떠난 후에 사랑인 줄 아는 일이 빈번하고, 후회하는 악순환을 맞이한다. 선영과 재훈은 첫눈에 반하는 커플이 아니라 아웅다웅하는 커플이다. 어쩌다 가슴속 깊은 이야기를 서로에게 꺼내면서 서로 남자와 여자로 보기 시작한다. 볼 꼴 못 볼 꼴 다 본 후에야 서로의 곁에 조금 다가간다. 보통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된다. 백마 탄 왕자와 드레스 입은 공주의 만남은 옛날 동화 속에나 있다. 요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도 백마 탄 왕자와 드레스 입은 공주의 만남은 거의 없다. 서로의 단점을 본 후에도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요즘 연애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점 없는 사람은 없다. 단점이 싫어서 헤어지는 게 쿨하다고 믿는 건 성숙하지 못한 연애를 이끌 것이다. 바람, 폭력, 도박 등 치명적 단점이 아니라면 상대의 단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연애에서 해피엔딩이란
연애에서 해피엔딩이란 뭘까? 옛날 철학자들은 사랑의 완성은 이별이라고 말했다. 이별이야 말로 상대에 대한 환상을 깨지 않고, 평생 간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철학자가 아니고 보통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은 곧 결혼이라는 도식을 떠올린다면 옛날 사람이다. 남편은 남의 편, 거추장스러운 존재라고 지인들은 말한다.(남편님들 미안합니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환상을 깨는 이벤트고,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편이라고 '우길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다. 결혼은 연애의 해피엔딩이 아니다.
연애에서 해피엔딩은 서로에게 씌워진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는 것이다. 콩깍지의 수명은 겨우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한다. 유통기한이 짧은 콩깍지가 벗겨져도 지지고 볶았던 시간들 속에 쌓인 의리, 믿음 등 다른 요소들이 있다. 우리는 그 요소들도 사랑의 요소라고 부른다. 사랑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차곡차곡 잘 쌓아서 사랑의 불씨가 꺼지려고 할 때 살릴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는 연애가 해피엔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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