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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이십 대에 나는 그 사람을 보면 무척 설레었지만, 티도 잘 안 냈다. 혹시 우연히 만날 경우를 대비해서 옷도 신경 써서 입었다. 언제 마주쳐도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내가 왜 그 사람에게 신경을 쓰고, 하루 종일 생각하는 이유를 잘 몰랐다. 맥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가 그 사람과 마주 앉아있으면 들떠서 날아올랐다. 왜 그렇게 마음이 출렁이지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해서 표현도 못 했다. 졸업과 취업 등으로 그 사람만 생각하는 열병을 앓던 시기가 지났다. 격렬했던 감정은 희미해졌고, 내 감정에 대한 기억만 남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깨달았다. 이십 대에 만났던 그는 내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첫사랑이라는 감정은 연애를 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 후에야 알게 되는 감정이었다. 내 경우에는.       


<윤희에게는>는 첫사랑의 모호하고 당혹스러웠던 감정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동성이어서, 그리고 사랑인지 잘 몰라서 놓쳤던 감정. 스무 살의 윤희는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가족들은 윤희를 몹쓸 병에 걸린 듯이 대했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데 정신병원이라니. 스무 살에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다면, 우리는 모두 병에 걸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사람이 동성이든 이성이든. 윤희가 스무 살 때, 가족 내에서 아버지, 오빠, 즉 남성의 말이 절대 권력이었다. 윤희가 여자친구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오빠의 처방은 "빨리 결혼해"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윤희는 스무 살이 되는 딸 새봄과 살고 있다. 윤희는 하나의 표정을 짓고 살아간다. 어둡고, 말이 없다. 딸과도 필요한 말만 한다. 공장 구내식당 주방에서 일하면서 틈이 나면 넋을 놓는다. 저녁이면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딸 몰래 담배 한 대를 피우면서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윤희는 동성을 사랑한다고 말한 스무 살 이후의 삶을 잉여로 규정했다. 그 어떤 즐거움도 허락하지 않는 저주의 시간에 자신을 던져놓았다. 숨만 쉬고 감정을 거세해 버린 채, 과거를, 현재를 견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야.




어린 윤희에게 필요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윤희에게 이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어린 윤희는 동성을 사랑하는 것을 ‘질병’으로 보는 가족이 있었고, 가족의 시선에 따랐다. 그 후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습관적으로 살았다. 이십 년 전에 난 상처는 아물지 않아 여전히 쓰라리다.      


열아홉 살 딸 새봄은 경수와 연애 중이다. 딸의 사랑하는 방식을 보고 윤희는 사랑을 배운다. 여자친구가 가는 곳은 다 같이 가고 싶고, 우울해하면 그 이유가 궁금한 남자 친구.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다. 스무 살 무렵,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안 헤어지고 평생 함께 살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제 서로에게 첫사랑을 하는 아이들을 결혼 제도 속에 가둘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는 연인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건강하게 헤어지는 일도 배우는 시기일 뿐이다. 스무 살 무렵의 첫사랑은 물정을 모르고, 변덕스럽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도 잘 모른 채 화도 냈다가 화해하고, 버려진 장갑을 리폼해서 한 짝씩 나눠 끼고 비싼 명품 장갑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시절이다. 사소한 물건 하나로 ‘너’와 ‘나’가 '우리'라는 의미가 되는 인생에서 다시 올 수 없는 순수한 만남을 경험하는 시기다.      


윤희의 순수한 만남은 가부장제의 편견으로 무작정 거부당했다. 윤희는 새봄과 경수의 우정 같은 사랑에서 자신의 과거 첫사랑의 그림자를 본다. 스무 살의 윤희는 불안하고,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휘둘렸다. 옆에서 따뜻한 묵묵한 시선이 절실한 시기였다. 윤희 곁에는 자신의 사랑을 지켜보고 판단할 힘을 기르게 도와준 어른이 없었다. 사회 제도를 대변하는 부정적이고, 융통성 없이 혹독한 어른의 시선만이, 어린 윤희를 질책했다.      


윤희에게 첫사랑은 감춰야 하는 것이 되었다. 윤희는 딸 새봄을 보면서 꽁꽁 숨겼던 추억을 찾을 용기를 낸다. 딸과 쥰을 찾아 일본에 갔다. 이십 년이 흘렀지만 쥰도 윤희도 서로의 꿈을 가끔 꾼다. 윤희가 쥰에게 쓴 편지는 전달되지 않지만 마음에 바람이 부는 쥰을 어루만진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 우정 이상의 감정에 겁을 먹고 달아났다. 두 사람은 잘못이 없다는 걸, 한참 후에 깨닫는다. 새봄과 경수가 사랑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듯이. 윤희와 쥰이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간직하고 있던 상처를 들춰내는 일이다. 처음에는 아프고 쓰라리지만 조금씩 새살이 돋을 것이다.     


윤희는 이제 첫사랑의 기억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 한정식 식당에서 일도 배우고, 나중에 음식점도 차릴 거라면서 이력서를 들고 조심스럽게 식당 문을 연다. 이제 윤희는 웃기도 하고, 새봄의 연애 조언자가 되기도 할 것이다. 틀린 사랑은 없다.  그 대상이 누구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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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0-14 13:56:19
  • 수정 2022-10-14 13: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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