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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초행>이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번 생은 처음이라' 쯤 되는 이야기이다. 이번 생이 처음인 건 청년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중년, 노년 어느 세대에게도 마찬가지다. 중년의 비혼이라는 정체성에 요즘 백수라는 정체성이 추가되어 혼란스럽다.  나는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체력은 저질로 떨어진 지 한참 되었고 관절도 조금씩 돌봐달라는 신호를 보낸다. 내 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낯설어서 얼떨떨한데 진로 고민까지 안고 있다. 이삼십 대의 고민을 중년의 몸으로 하고 있자면, 내 나이에 맞는 고민일까 궁금하다. 진로 고민은 청년기 때 해도 힘들거늘 부실한 관절들의 아우성 속에서 버겁다. 하지만 별 수 있나. 관절들을 쓰담쓰담하고 달래면서 엉킨 생각의 매듭을 풀어가는 수밖에. 나는 내 몫만의 근심이 있는데 커플은 어떨까. 커플의 이야기인 <초행>은 자신도 모르게 처한 상황을 보게 게 되면서 혼란스러운 심경을 담는다. 


지영과 수현은 7년 차 커플로 동거 중이다. 두 사람은 각자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사랑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힘든 노동 후 짬뽕에 소주잔을 부딪치며 의지도 하고, 넉넉하진 않지만 별 다툼 없이 살아간다. 지영과 수현 커플에게 위기는 미래가 불확실한 직장도 아니고, 사랑의 빛이 바랠까 봐 두려운 마음도 아니다. 결혼하지 않고 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지영이 부모님의 시선이다. 지영가 본가를 찾아갔을 때, 부모님은 친적 결혼식에 수현이라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말한다. 지영이가 이유를 묻자, 지영이 엄마는 친척들에게 두 사람의 동거를 어떻게 알리냐고 말한다. 지영의 부모님은 지영이 수현과 결혼을 한다는 전제하에 동거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탐탁지 않다. 부모님은 결혼식을 안 하고 살고 있는 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대변하고 있다. 수현은 미술학원 강사이고 대학원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영이 아버지의 눈에는 장래가 없어 보여서 미술학원을 차려주겠다는 걸 은근히 암시한다. 장래 사위의 생계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나치게 수현의 삶에 간섭한다. 


지영과 수현은 부모님의 조바심이 낯설다. 두 사람은 왜 결혼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결혼식을 안 해도 함께 사는데 불편함이 없는데 왜 번잡한 결혼을 해야 하나. 


지영이 부모님이 결혼을 다그치는데도 짜증과 침묵으로 답하던 커플이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영이 임신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의 계획 속에 임신 없었다. 예상치 못한 임신은 두 사람에게 생각의 전환점이 된다. 동거만 하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가능할까. 두 사람은 기쁨보다는 두려움, 망설임 속에 내던져진 채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함께 살면서 지영과 수현은 서로의 취향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혼을 고민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지영은 수현의 가족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수현의 본가에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찾아간다. 


수현이 여자 친구와 인사를 와서 어머니와 따로 사는 아버지도 함께 밥상에 앉았다. 수현의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서 술을 마시고 결국 과해서 취해버린다. 수현의 아버지는 급기야 육두문자를 쓰면서 자신을 집밖으로 내친(?) 수현이 어머니를 비난하면서 깽판을 친다.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두 사람이 결혼 제도를 고려하면서 안 보이던 것을 보게 된다. 동거는 두 사람의 결합이라면 결혼은 상대방의 가정환경에서 나온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서약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지영이는 자신의 본가에서 엄마가 잔소리를 하면, 삐딱하게 굴고 화를 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수현의 본가에서는 싹싹하고 상냥하다. 여자에게 결혼은 이런 가면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수현은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택했지만 결혼 제도 앞에서는 사회화 교육으로 자연스럽게 예비 며느리의 가면을 썼다. 수현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수치심으로 본가를 나와버리지만 지영이가 수현을 설득해서 본가로 들어간다. 수현이 어머니는 지영이에게 "지옥은 죽어서 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사는 게 지옥"이라는 엄청난 말을 한다. 지영은 겁이 난다. 다음날 아침 서울로 올라오기 전, 지영이는 수현에게 소리친다. 



나, 너무 무서워.



현재 한국에서 결혼하지 않은 커플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코로나로 인한 재난지원금이 우리 사회가 가정을 얼마나 경직된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려주었다. 전 국민에게 지급한다는 재난지원금은 사실은 세대주 기반으로 가장 전형적이고 진부한 결혼 제도 속에 있는 가정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혼 제도 속에 있지만 세대주와 따로 살거나 동거 커플에게는 험난한 재난지원금이었다. 지영이 무섭다고 말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결혼은 개인 대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집안 대 집안의 결합이다. 집안 식구들은 두 사람의 결혼 서약을 하면 그들이 두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공식적 권리를 얻는 것처럼 착각한다. 결혼이 개인 대 개인의 결합이라면 지영이 무섭다고 외치지도 않았을 것이며, 수현이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영이는  자신의 부모님과 수현의 부모님을 보고 남들 다 하는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남들 다 하는 결혼을 안 하면 어떨지도 알 수 없다. 두 사람의 미래는 두 사람에게 달려있다. 제도권이 인정하는 가정을 꾸린다면 그 후의 삶은 어떨지, 알 수 없다. 이리도 가 보고, 저리도 가 보면 좋은데 인생이라는 게 하고 싶은 대로 막 해도 즐거움만 있는 게 아니라 상처도 동시에 남는다. 


이 커플의 이야기를 보고 있으니까 내 고민은 하나로 수렴되어 무지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 비혼이라 삶이 단출해서 내 진로만 늘 고민이었다. 가족을 이루어 함께 사는 일에는 무척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위안도 많이 받지만 가족에게 상처 또한 가장 많이 받는다. 서로 상처를 주면서 매일 부딪쳐도 핏줄이라는 이유로, 상처는 털어버리려고 노력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지영과 수현에게는 앞으로의 진로는 직장뿐 아니라 결혼과 출산, 그리고 양육이라는 커다란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두 커플에게는 젊음이 있으니 위안이 될 거라고 우겨본다. 근데 사실 나이들어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거는 똑같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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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0-25 13: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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