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시대에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여자의 행동 반경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가족과 이따금 집에 오는 손님이 전부인 시대에 여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사진이 없던 시절 초상화를 미래의 남편에게 보내야 하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이 생업인 화가, 마리안느. 엘로이즈 집의 하녀 소피. 세 여성은 각자 다른 계급이고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억압적이고, 타인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여자라는 점에서 똑같다. 세 사람 모두 또래이고,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궁금하다.
연대 하나-마리안느와 엘로이즈
화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의 집에 온다. 바다 건너 힘겹게 도착해야 하는 외딴 저택은 어둡고 경직되어 있다. 엘로이즈의 얼굴은 집만큼이나 굳어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속에서 산책을 하면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관찰한다. 손을 포개고 앉은 모습,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는 옆모습 등등. 마리안느는 자신의 피사체를 관찰하면서 점점 애정을 느낀다. 화가가 자신이 그릴 대상에게 애정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세심하게 관찰하다 보면, 그 사람의 사소한 표정과 버릇을 알게 되기 마련이다. 엘로이즈 역시 마찬가지다. 함께 산책을 하면서 마리안느가 불편할 때 윗눈썹을 올리는 모습을 알게 된다. 이런 사소한 표정의 변화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이다. 누군가가 나보다 내 표정과 기분을 더 잘 관찰하고 있다면,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이렇게 끌리고, 어느 날 서로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한다.
엄격한 가부장제와 이성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동성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자신과 시간을 많이 보내서 더 잘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라면, 그 사람에게 끌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가부장제와 이성애의 사회에서 동성애는 늘 추악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의 임무를 고백한다. 초상화를 그리러 왔다고. 사랑의 시작과 함께 신분을 고백해 버린다.
초상화를 완성하는 일은 이제 두 연인의 임무가 된다. 비밀리에 그렸던 초상화와 달리, 두 사람은 이제 한 사람은 모델, 한 사람은 모델을 그리는 화가가 된다. 모델과 화가의 교감은 캔버스에 그대로 드러난다. 비밀리에 그렸던 초상화 속 엘로이즈는 경직된 표정에 딱딱한 자세였다. 두 사람이 사랑을 확인한 후 그린 초상화 속에는 부드럽고, 온화하고, 매력적인 여인의 모습이 있었다. 교감은 캔버스에 영혼을 불어넣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사랑과 우정은 점점 더 깊어진다.
연대 둘-마리안느/엘로이즈와 소피의 사랑과 우정
이 영화는 두 여인의 사랑만을 다루는 단순한 퀴어영화가 아니라 계급을 초월하는 여성 연대를 보여준다. 소피는 엘로이즈의 하녀이다. 소피는 엘로이즈의 엄마가 부재하는 동안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를 지켜보지만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가십거리로 삼지도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성심껏 한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두 사람이 산책을 갈 때, 바람을 막으라고 얼굴 수건을 살뜰히 챙겨준다. 두 사람의 사랑은 소피에게는 그 어떤 금기 사항도 아니다.
소피는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두 여자에게 말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소피가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걸 알고 유산을 도와준다. 알고 있는 여러 가지 민간요법을 써 본다. 바닷가에서 소피가 쓰러질 정도로 달리게 해 보고, 약초를 캐서 짜 마시게도 한다.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결국 낙태 시술을 하는 노파를 찾아가고, 소피의 두려움을 곁에서 함께 지켜봐 준다. 원하지 않은 아이를 갖는 건 소피만의 문제가 아니라 두 여인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나아가 당시 모든 가임기 여성의 문제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소피의 두려움과 어려움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고, 소피의 의견만을 묻고 소피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른다. 여성의 몸을 아이 출산의 도구로 보지 않고, 자기 선택권을 존중하는 건 세 사람이 같은 여성이기 때문은 아닐까. 두 사람이 소피에게 보여준 태도는 우정을 넘어서 신분이 다른 여성에 대한 이해와 배려이다. 여성의 연대는 각자 처한 신분과 정체성이 달라도 상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세 사람의 연대와 사랑은 신분과 계급을 초월했다. 그저 곤경에 처하고 도움이 필요한 여자라는 점이다. 무엇보다 상대의 상황을 판단하지 않고, 도움을 청할 때 도와주는 일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질투와 시기가 여성의 천성적 기질로 전해지는 건 남성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여자들은 우리도 모르게 남성의 고정관념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사랑과 우정은 열정적이었지만 시끄럽거나 소란하지 않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세 여자가 읽으면서 견해가 엇갈린다. 소피는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를 비난한다. 연인을 잃지 않으려면 뒤를 돌아보지 말았어야죠,라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는 연인의 이별이 아니라 시인의 이별을 택했다고 말한다. 뒤를 돌아본 건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세 사람 역시 평생 함께 할 수 없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격렬히 사랑했고, 엘로이즈와 이별했고, 헤어지는 추억을 기념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두 사람의 가슴속과 작은 그림 속에 남는다.
영화에서 가부장제의 틀을 흔들기 위해 혁명이나 시위는 없었다. 하지만 세 여성이 보여준 내적 연대야말로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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