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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양육으로 젊은 시절을 쏟아붓다 갱년기를 맞이한 여성들은 자신의 가치와 효용에 대해 고민한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정신적 독립해서 엄마를 타자화한다. 양육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지인들은 공허를 호소하지만 딱히 다르게 사는 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다르게 살고 싶지만 용기도 없고 방법도 몰라서, 습관대로 살아간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는 것이 저주가 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갈팡질팡한다. 몸은 예전 같지 않다. 삶의 만족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그러다 '시스터 후드'가 꽃 핀다. 혼자는 겁나지만 여럿이 모이면 해 볼만하고, 무엇보다 공감대 형성이 쉽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삶에서 비슷한 눈높이를 가진 이들과 소통하면서 폭풍처럼 쏟아내는 수다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 수다는 분명히 힘이 세지만 한계도 있다. 말을 많이 한 날에는 주책맞은 건 아닌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터 후드에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과 정서적 연대를 이루며 서로의 버팀대가 된다.      


<캐롤>도 커다란 틀에서 보면 시스터 후드의 연장이라고 보고 싶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캐롤이 성정체성을 찾아서 가정을 뛰쳐나오는 것이다. 캐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발견하고, 집을 뛰쳐나갈 때까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캐롤이 시부모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시부모는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해서 상대의 의견보다 그들의 판단을 우선시했다. 깐깐한 시부모는 그들의 고정관념을 캐롤에게 강요했다.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은 허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었고, 캐롤만 이방인이었다. 관습과 허식에 익숙한 남편은 캐롤이 왜 결혼을 파기하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캐롤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 사는 것에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성소수자인 캐롤은 여자 애인  때문에 딸과 가족을 버렸다고 비난받아야 할까. 이성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가족만을 ‘정상 가족’으로 보는 관점은 편견이다.      


캐롤은 중년에 접어들었고, 인내로 젊음을 보냈듯이, 어린 딸을 위해서만 나머지 시간을 보낼 생각이 없다. 캐롤이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남편이 딸에게 접근 금지권을 발동해서 딸을 며칠 못 보자 캐롤은 금단현상을 겪는다. 딸에 대한 모성은 모성이고,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삶이다. 이런 캐롤에게 모성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18세기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엄마라면 딸을 위해 자신의 삶은 희생해야 한다는 말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캐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추구하는 열정이 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스럽지만 포기해야 할 것도 포기할 줄 아는 용감한 사람이다. 고통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손에 쥐고 버티는 데서 온다.      


사랑이 끝날 때는 이유가 많지만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날 때 이유가 없다. 캐롤은 순수한 테레즈에게 첫눈에 반한다. 테레즈는 장난감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고, 캐롤은 손님으로 처음 만난다. 만나자마자 캐롤은 테레즈에게 은밀한 눈빛을 보낸다. 대놓고 호감을 보이는 사람을 보고 설레면 사랑 행 열차에 탑승하는 것이다. 테레즈는 거절을 해 본 적이 없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젊음이 낭비되는 이유이다. 그런 테레즈 눈에 캐롤은 우아하면서 명쾌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때는 단호해 보인다. 캐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테레즈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캐롤에게 무척 끌린다. 캐롤은 양육권 소송 중에 딸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받고,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테레즈와 서부로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길 위에서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서로에 대한 친밀감이 쌓인다. 서로 무엇을 좋아하고 쉴 때 어떤 모습인지 알아간다. 사랑은 커다란 이벤트가 아니다. 캐롤이 처음 테레즈를 집으로 초대했을 때 테레즈에게 최신식 카메라를 선물한다. 이런 일은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로 사랑의 깊이를 측정하는 척도가 아니다. 상대가 일상에서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몰래 관찰하고 알아가면서 사랑의 뿌리가 점점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서부 여행은 두 사람이 함께 내린 뿌리를 깊숙하게 내리는 사랑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먹서먹한 감정 대신에 서로를 원하고 안 보면 그리워하게 되는 시간이 쌓였다. 사랑이 활짝 꽃피는 시기여서 그들을 지켜보는 내 마음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머리칼이 날리는 캐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는 테레즈.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도 모르는 상대의 모습을 더 잘 알게 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하는 표정과 몸짓, 머리칼이 날리는 모습까지 관찰하고 간직해서 곱씹고 싶어 한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헤어질 위기가 찾아온다. 같은 성sex인 캐롤과 테레즈는 사실 늘 헤어질 위협 속에 놓여있다. 테레즈는 약혼자가 있지만 그를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다. 캐롤을 만나면서 그녀는 남자와 결혼하는 이성애는 보편적 사회규범일 뿐이지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사랑한다고만 말할 뿐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은 강요한다고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설령 강요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선택은 불행을 낳기 때문이다. 캐롤은 자신의 결혼으로 깨달았다. 함께 사는 일에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함께 살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캐롤은 테레즈에게 혼자 살 집을 구했는데 집이 커서 함께 살아도 된다고 말을 한다. 선택은 테레즈의 몫으로 남겨지고, 테레즈는 망설임을 극복하고 캐롤과 함께 살기로 결정한다. 캐롤은 딸의 미래를 위해서 레즈비언 엄마가 양육권을 갖는 것을 포기하고 면접권만을 요구한다.           


가부장제가 제시하는 성역할에 충실히 길들여진 사람은 캐롤을 비난하겠지만, 나는 캐롤의 영리함에 감탄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일은 쉽지 않다. 아이는 클 것이고, 독립해서 엄마는 아이에게 그저 배경이 될 날이 올 것이다. 캐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테레즈와 연인이 되든, 자매애를 느끼든, 또는 자신의 욕구를 관철하는 (그 당시에) 희귀한 여성의 연대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만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두 여인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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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1-09 15:3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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