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커트 보니것의 <제5 도살장>
나이가 드는 것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깨닫고 내 자리를 바라보는 일이다. 이것이 꼭 좌절이나 포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중년이 되니 알겠다. 찬실이는 마흔 살이다.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다 감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실직했다. 하루아침에 중년 백수가 되어버렸다. 평생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만들며 살 줄 알았는데 감독이 죽으면서 판타지가 깨졌다. 인생은 꿈꾸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실제 삶에 엄청난 영향을 발휘해서 휘청이게 된다. 마흔 해쯤 살았다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찬실이는 집도 없고, 일도 없고, 남편도 없고, 연애도 못 해봤다. 직장을 잃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달동네에 자리 잡은 허름한 주택의 문간방으로 이사를 했다. 살림살이도 단출해서 플라스틱 빨간 다라이에 살림살이를 넣어 머리에 이었다. 동료들이 자질구레한 짐을 두 팔에 들고 언덕길을 오른다. 생계가 막막한 찰나. 친한 동생인 여배우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알바를 한다. 좋아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영화 만드는 일인데 하루아침에 일상이 180도 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장국영이라는 귀신도 보이고 대화한다. 장국영이 출현하는 설정에서 나는 판타지가 아니라 극사실주의를 보았다. 우리가 각종 난관에 봉착했을 때 버틸 수 있는 힘은 자신만이 만들어내고 믿을 수 있는 환상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해서 희망 지수를 최대치로 올리면 과대망상이 된다. 미래에 대해 지나친 낙관을 제어하는 자아 성찰식 유령은 현실에 두 발을 딛게 도와준다. 희망을 적절한 강도로 품으면 비관적 상황도 낙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찬실이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사랑이다. 상호적 사랑이 아니고 짝사랑이지만 의미가 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모든 근심을 잠시 잊는다. 사랑하는 대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찬실이 말대로 생각 안 하려고 해도 그게 쉬운 게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발등의 불도 끌 수 있게 계속 생각나는 게 사랑이다. 찬실이는 친한 배우 동생집에서 다섯 살 연하의 단편영화감독을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연정이 무럭무럭 자라서 고백하기에 이른다.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을 보고 영화를 만들게 되었고,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찬실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을 좋아하는 단편영화감독은 <동경 이야기>는 사건이 안 일어나서 밋밋하다고 말한다. 찬실이는 부모가 죽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사건이 없는 영화냐며 발끈한다. 찬실이의 저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요한 사건으로 여기는 어여쁜 마음.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찬실이는 빛이 난다. 단편영화감독에게 고백 후 '그냥 누나'라는 대답을 듣지만 찬실이는 안다. 영화를 사랑하고 만드는 이들에게 연인보다 동료가 더 값질 수 있다는 것을.
앞으로 영화 제작 피디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지만 옆에 영화를 만드는 동료들이 친구로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헛 살진 않았다. 결국 일을 그만두어도 남는 건 관계이고, 관계는 사람을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 환경이 바뀌면 관계도 다시 맺는다. 찬실의 새 보금자리의 집주인 할머니는 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산다. 한글을 몰랐던 할머니는 주민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는 중이다. 할머니는 받침이 많으면 머리 아파하고, 영화 프로듀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잘 살아왔다. 할머니의 지혜는 남겨진 미래가 짧다는데서 나온다. 우리는 '카르페 디엠'을 애써 숙지하고 갈망하지만,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불안 때문에 현재를 희생한다. 할머니는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한다.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대신 애써서 해.
할머니가 살아가는 이 태도는 우리가 오매불망하는 '카르페 디엠'이다. 찬실이는 자문한다. 영화 없이 살 수 있나? 우정을 나누는 것,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일은 영화보다 더 가치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갈증이 완전히 해소될까? 일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사람 몸은 한 가지 음식만 먹고는 버틸 수 없다. 인스턴트와 MSG가 나쁘지만 가끔씩 홀린 듯 먹어야 살아있는 거 같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일에 대한 성취욕만 있다면 우리의 정서는 바싹 말라서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가루가 될 것이다. 친한 여배우 동생은 네티즌들한테 발연기란 소리를 듣고 연기를 그만두고 싶어한다. 그녀는 꽐라가 되게 술을 마시고 이겨낸다. 할머니는 딸을 먼저 보낸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찬실이가 유령을 보고, 다시 시나리오 작업을 하느라 지쳐도 영화를 함께 보겠다고 우르르 몰려오는 동료들이 있다. 오밤중에 좁은 방에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다. 이들은 먹을 것을 사려고 앞이 안 보이는 밤길을 함께 내려간다. 혼자 간다면 멀고 어두운 길이 왁자지껄함 덕분에 작은 손전등 하나만 있어도 갈 만하다.
준비되지 않은 채 일자리를 잃고, 아는 여배우 동생의 가사도우미로 생계를 잇고, 사랑을 느껴 고백했지만 이불 쓰고 하이킥을 날릴 반응만 얻었다. 객관적 사실만 나열하면 암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재치 있고 유머를 품고 찬실이를 이끈다. 안 웃으면 또 어쩌겠나. 살아있고, 마흔이지만 백 세 시대에 절망에 가라앉아 그대로 침잠하기에는 너무 젊다. 허황된 신분 상승이나 성공을 꿈꾸는 이야기가 아니라 잔잔한 옆집 언니 같은 이야기라 위안을 얻는다. 찬실이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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