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The Psychology Times=황선미 ]


“옛다, 처먹어라” 하면서 서비스 계란후라이를 던져주는 욕쟁이 할머니에게 화를 내며 달려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표면 메시지와 이면 메시지가 다른 것이 ‘이중 메시지’의 정의라면 할머니의 욕 속에 숨은 친절은 이중 메시지 중에서도 이중 메시지인데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재밌기만 하니 이상한 마음이다. 엄마의 이중 메시지에는 듣자마자 가슴이 답답해지는데 욕쟁이 할머니의 욕은 왜 괜찮은 걸까?


가족상담이 처음 태동한 시기는 1950년대로 그 전까지의 심리학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만 볼 수 있고, 잴 수 있었다. 현대인이 가족의 문제라고 언급하는 대화, 친밀감, 교류 이런 단어들이 주류 상담이론으로 들어오게 된 건 그러니까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가족상담 연구의 초석이라고 볼 수 있는 Bateson등(1956)의 <조현증 이론을 향하여> (원제: 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는 가족처럼 도망갈 수 없는 환경에서 ‘친절한 표면 - 거절하는 내면’이 상반되는 이중 메시지에 장시간 노출되는 경험이 한 사람에게 조현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이중 메시지가 조현증의 원인일까? 우리 삶에 주어진 고통이 그렇게 단순하다면 참 편할 텐데 안타깝게도 70년 전에 발표된 관찰연구로 정신 증상과 원인의 인과관계를 추론하기에는 적합성의 오류가 따른다. 다만 부모의 이중 메시지가 지속될수록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지도 떠나지도 못하게 되며, 미움과 죄책감 속에 속박된 환경은 마음의 병을 일으킬 만큼의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 그렇다면 욕쟁이 주인 할머니의 이중 메시지는 왜 들어도 정신에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일까? 할머니의 욕 그대로 받아 처먹는 계란후라이가 오히려 정감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어른이 된 우리는 진심을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진심을 보는 능력이 있다. 적어도 이 능력이 있어야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진심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느낄 수 있는데, 이를 말하는 사람의 측면에서 찾고자 하면 어떤 이에게는 말끝의 뉘앙스로 나타나고, 어떤 이에게는 눈썹 끝의 각도로 나타난다. 하지만 진심을 말하는 사람의 측면에서만 찾으려고 할 때 우리는 편집적인 의심에 시달리기 쉽다.


‘저 사람 지금 말하면서 살짝 웃었어. 저 웃음 왠지 진심이 아닌 것 같은데?’


이 생각을 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상대방의 진심을 찾아내려는 의심이 일어나고 이런 의심이 짙어질수록 상대의 진심은 그 사람을 떠나간다. 그러니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의 진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듣는 사람 쪽에서 진심을 보는 능력’이다. 보이지 않는 진심을 보고,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이 있으므로 우리는 욕쟁이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 스며있는 ‘배불리 먹이고자 하는 진심’을 읽은 게 아닐까?



2. ‘주는 행동’은 삶을 풍성하게 한다.


앞서 소개한 Bateson등(1956)의 <조현증 이론을 향하여>(원제: 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는 조현증 자녀를 둔 가족(특히 엄마)이 만드는 상호작용을 분석한 연구이다. 하루는 연구팀이 자녀의 입원 병동에 병문안을 간 엄마를 관찰하였다. 그곳에서 발견된 것이 그 유명한 ‘이중구속 이론(double bind theory)’이다. 엄마를 보고 반가움을 느낀 자녀가 안아달라고 달려올 때 엄마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정작 안아달라는 자녀를 살짝 밀어내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는 내용이다. 이때 자녀는 사랑한다는 엄마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으니 이중으로 덫이 되는 환경이라고 해서 이중구속, 이중 메시지라는 개념들이 만들어졌다. 이 연구에 등장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주지 않은 것은 순수한 환영과 기쁜 마음일 것이다. 반면 욕쟁이 할머니가 곱은 손으로 계란후라이를 얹어줄 때 손님이 받은 것은 진심 어린 환영이다. 진심을 주는 행동은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는 힘이 있다. 물론 성숙한 배려를 위해서는 무엇을 얼마만큼 누구에게 줄 것인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주는 사람’과 ‘주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친구를 고르라고 하면 나는 ‘주는 사람’을 선택하고 싶다.

   


3.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가?


표면과 이면이 불일치한 메시지 속에서도 인간은 따뜻한 진심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다. 아니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진심이었기 때문에 불일치 속에서도 욕쟁이 할머니에게는 반전의 매력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지금껏 경험했던 이중 메시지는 대부분 타인에게 보이는 자기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었지 메시지를 듣는 상대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증상에 취약해지기 좋은 환경이었다. 욕을 먹었는데 왜 기분이 괜찮을까? 아마도 우리는 친밀한 인간관계를 위한 주재료가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행위와 주는 진심을 알아차리는 안목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위에 표면과 이면이 일치하는 의사소통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다.



참고문헌

Bateson, G., Jackson, D. D., Haley, J., & Weakland, J. (1956). Toward a theory of schizophrenia. Behavioral Science, 1(4), pp.251-264.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psytimes.co.kr/news/view.php?idx=4873
  • 기사등록 2022-10-26 11:27:41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