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연
[The Psychology Times=유시연 ]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한 대학생이 남영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정권의 불합리한 탄압에 저항하던 중 치안본부의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폭행을 포함한 극심한 고문으로 인해 도중 사망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당시 정부에서 박종철의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둘러대었다가,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 보도로 인해 사건 발생 5일 뒤 물고문 사실이 공식 시인되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6월 민주항쟁의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부당한 정권의 횡포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청산해야 할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는 것이 나라의 역사에 있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 과거에 대해 명확히 진실을 규명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나라의 또 다른 숙제가 될 것이다. 그 또 다른 예로는 독일의 ‘나치 정권’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 이후, 강력한 독일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히틀러는 나치 당을 결성했다. 나치 정권은 독재 정치를 수립하고, 반유대주의적 사고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보내 학살했다. 당시 독일에서 학살된 유대인은 총 6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독일인들의 유대인을 차별하는 분위기는 사회 전체적으로 팽배해 있었다고 한다.
나치 친위대 대령으로, 독일의 점령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을 체포해 강제 이주시키는 업무를 수행하던 아돌프 아이히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1945년 독일의 항복 이후, 개명까지 하며 아르헨티나의 한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숨어 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1960년 5월,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보 기간 모사드로부터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게 된다. 당시 미국의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했던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해당 재판 과정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집필하였고, 그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해당 재판 소식을 들은 많은 대중들은 아이히만의 정체에 대해, 포악한 성격의 전형적인 악인일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그는 가정에 충실한 평범한 중년 남성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명령을 따랐을 뿐, 유대인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은 없었기에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저 권력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해당 발언에 대해“당신의 죄는 ‘사유의 불능성’, 그 가운데서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한 무능함”이라며, 불의한 일에 대해 자신의 사소한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지 못한 것 역시 잘못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처럼 ‘악의 평범성’이란, ‘악(惡)’이 특이하거나 괴이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누구나 지니고 있고 언제든 저지를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1961년, ‘권위적인 불법적 지시에 다수가 저항하지 못함’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의 실험을 진행한다. ‘징벌에 의한 학습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이라는 명목 아래, 실험 참여자를 모집하고 교사와 학생, 두 부류로 분리하였다. 학생 역할의 피실험자는 가짜 전기 충격 장치를 달고 고통받는 연기를 했고, 교사 역할의 피실험자에게는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15V에서 450V에 달하는 전기 충격을 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밀그램은 실험 전, 단 0.1%의 참가자만 450V 전압의 전기 충격을 줄 것이라 예상했으나, 실제로 해당 전압을 사용한 참가자는 65%에 달했다. 이들은 그 정도의 전기 충격이 사람의 생명에 위협적임을 알고 있었고, 학생 역할의 참가자들의 비명도 들었으나 모든 책임은 연구원이 지겠다는 말에 쉽게 지시에 복종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한 명씩은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어느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악한 모습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것들이 모여,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일어난 처참한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꼭 나치 정권과 같은 정치적 맥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생활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다. 군대에서의 집단 가혹행위, 서열화된 체계 내에서 발생하는 학교 폭력 등 위계가 있는 곳, 동조할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가능하다.
우리나라도 독일과 같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바로, 기사의 앞부분에서도 언급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다. 당시 고문에 일조했던 수사요원들을 포함한 정부는 시신의 화장을 요청하는 등 해당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의 보도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해당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의 독재 정권은 이러한 고문 경찰로서의 업무를 일반 경찰, 형사들이 전수 받게 하며 그들을 탄압 사건에 이용하였다. 권력의 묵인하에 벌어지는 고문 행위는, 그 어떠한 관점에서도 합리화될 수 없지만 그들은 ‘공무 집행’이라는 명목 아래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는 국민에 폭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당시와 다른 사회 분위기라면 어땠을까. 그들에게 그러한 임무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수사 과정에서 폭력이 사용되지 않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분위기였더라면, 결과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독재 정권의 고문 형사를, 히틀러 정권에 일조한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자들을 감싸려는 것이 아니다. 악의 평범성, 우리 주변의 평범한 누구든, 어쩌면 그것이 우리라도 상황에 따라 내면의 악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한 명의 변화가 모이고 모여, 한 나라의 아픈 과거로 영원히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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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이상빈. (2001). 프랑스 문학 속의 나치 수용소. 외국문학연구, (8), 377-393.
이병철. (2022). 제 3 제국과 ‘다른 독일’: 나치 저항의 기억문화. 독일연구, 49, 51-92.
김중권. (2019). 군인의 복종의무와 기본권행사의 충돌에 관한 소고. 행정판례연구, 24(1), 277-315.
하병학. (2012). 악의 모습과 기능: 한나 아렌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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