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민
[The Psychology Times=김신민 ]
어느 일요일, 나는 오전 9시에 일어나 청소를 마치고 싶었다. 점심시간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원고 쓰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눈을 떠서 핸드폰을 켰을 때 화면 속 시간은 오전 11시 30분이었다. 그 순간 오늘 계획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반쯤 마음을 내려놓았다. 아점을 먹고 나서도 노곤하여 슬그머니 이불로 들어가 뭉그적거렸다. 이불 안은 온돌처럼 따뜻하여 낮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곧 저녁을 맞이하는 시간이라 무엇을 시작하기 애매하게 느껴지는 오후 4시.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 청소로 하루를 시작했다. 지저분한 원룸을 정리하며 게으름을 반쯤 내려놓지 못했던 마음도 털어내고 싶었다. 청소를 마치고 주말에 흔히 볼 수 있는 후드 티셔츠에 재킷을 대충 걸쳐 마트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처럼 편안한 후드 차림을 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도 하루를 늦게 시작했기를 바랐다. 샐러드와 요거트 등 건강한 식재료를 노란 장바구니에 담았다. 집에 오는 길, 장바구니는 알차게 찼지만, 지하철 유리 창문으로 비친 자신이 탐탁지 않았다. 오늘 청소와 장까지 보았다며 나름 괜찮은 하루를 보낸 척하기에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남아 있었다.
나는 유리 창문 너머 두 가지 감정을 마주했다. 마음 한편에서 주말 계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내가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로, 주 5일 근무하고 토요일에는 교육도 받았으니 일요일에는 쉬어도 괜찮다는 너그러움이 일었다. 내가 실망감을 너그러이 품에 안지 못해서인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찜찜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렇게 어쩌다 하루 자신에게 실망하게 되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도 스스로를 향한 시선이 탐탁지 않다면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나는 2020년 말부터 급여를 높이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면서 상근직으로의 이직을 계획했다. 5개월 동안 자기소개서 및 면접 컨설팅을 받으며 쉬지 않고 지원서를 넣었지만, 최종면접에서 번번이 탈락했다.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으로 취업준비생이 되려고 했을 때, 탈락을 예상했던 곳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다. 자살시도자들을 위한 심리상담과 사례관리가 주된 업무인 곳이었다. 자살시도자들을 사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상담사로서 전문적인 역량을 쌓아야 했다. 내담자들을 도울 수 있도록 교육을 수강하며 임상심리사 2급과 청소년 상담사 2급을 공부하여 취득했다. 이직과 자격증으로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얻으니 마음껏 자신을 사랑하는 한 해였다. 그러나 2022년은 커리어 측면에서 성장 기록을 증명하는 성과가 하나도 없다. 올해도 상담 실력을 쌓기 위해 꾸준히 교육받고 공부했지만, 작년처럼 나를 충분히 인정해 줄 명분이 없어 보인다. 성과를 내려는 의무감이 묵직한 배낭처럼 무겁다.
성과를 내고 성공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나만 느끼는 무게일까?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에서 발표한 ‘30대 장기 미취업 청년들의 삶의 경험 연구’(2019)에서는 청년들을 둘러싼 사회가 취업하지 못한 상태를 관용하기보다는 ‘무능력’, ‘실패’라는 낙인감을 갖게 한다고 서술했다. 이에 따라 연구자는 너그럽지 못한 사회 분위기에 놓인 청년들의 삶을 ‘도전’보다는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시기로 표현했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우리는 대단한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압박감은 여러 관계에서 다양한 감정으로 우리를 밀어붙인다. 연구에서 청년들은 장기간 취업을 준비하여 부모님에게 죄송함을 느꼈고, 먼저 취업한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허망함을 실감했다.
누군가는 원하는 대로 스펙 쌓기, 취업, 승진으로 바라는 삶을 이루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러느라 어느새 우리는 성과, 성공이라는 족쇄에 묶여버리게 된 건 아닐까? 족쇄에 잡혀 버린 사실조차 잊고 달리다 보니 왜 자신이 절뚝거리는지 모른다. 절뚝거리며 뛰는 우리는 얼마나 숨이 가빴을까?
우리는 잠깐이라도 멈추면 다리 힘이 풀려 일어서지도 못할까 봐, 겁이 나서 무작정 내달렸는지 모른다. 또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에도 누군가 왜 멈춰있냐며 얼른 어디론가 가라고 재촉할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한계를 경험한다. 물론 스스로 도전하는 과정에서 성장에 보탬이 되는 한계도 있다. 그저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을 몰아세우는 태도가 나를 지키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나를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여 힘들어하는 친구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친구에게 실력이 부족했다며 다그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를 건넨다. 따뜻한 위로만이 다시 일어서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스스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자신의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넘어진 자신에게 빨리 일어나라고 외치기보다는 양팔을 다독이며 감싸 안기를.
원고를 쓰며 나를 다독이던 순간을 떠올렸다. 올해 더 높은 연봉을 주는 상담사 채용공고에 지원했었다. 1차 전형은 통과했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합격하기 쉬운 자리가 아님을 알았기에 아쉬움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최종 결과가 나온 며칠 이후에도 계속 미련이 남아 우울해졌다. 단순히 불합격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무엇이 내 마음을 흔드는지 들여다보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 네가 어떻게 그런 좋은 자리에 가겠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생을 살며 자주 느껴왔던 열등감이 나에게 말하는 이야기였다. 동시에 비난의 목소리 반대편에서 다른 이야기가 들렸다. ‘고생했어, 노력했는데 합격하지 못해 아쉽겠다’는 위로의 목소리였다. 사실 비난의 목소리, 위로의 목소리 전부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그 두 가지 중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지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적어도 자신에게 채찍질을 휘두르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을 향한 비난을 완전히 멈추지 못했다. 그래도 나를 지키기 위해서 비난의 목소리로부터 등을 돌리고 위로의 목소리를 마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우아영((주)제도와 사람 연구위원), 윤연숙((주)제도와 사람 연구위원). 2019. <30대 장기 미취업 청년들의 삶의 경험 연구>.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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