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
[The Psychology Times=신치 ]
페이스북에 잊고 있던 아주 반가운 인물이 친구 신청을 해 왔다. 그녀의 이름과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기뻤고, 또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때는 바야흐로 2003년으로 돌아간다.
학교 캠퍼스가 내려다 보이는 정문 맞은 편의 카페 창가에 눈이 크고 예쁜 그녀와 나란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해외여행을 앞두고 있던 그녀에게 아주 짧고 단편적인 나의 경험을 빗대어 이러쿵저러쿵 조언 따위를 해 주고 있었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세상 넓은 오지랖인 나는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고, 그녀는 조용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몇 개 없는데 그녀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이 장면은 유독 아주 선명하게 나의 뇌리 속에 박혀 있다. 이상하게 최근에도 몇 번 이 장면을 떠올렸는데 그때 마침 그녀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대학생 때 나는 주로 선배들과 친했다. 친한 동기도 몇 명 없었고, 후배들은 주로 나를 어려워했다. 동아리나 학회 활동도 했지만 이상하게 후배들은 선배들만큼 친하게 지내기가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은연중에 이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
애들은 너무 어려. 관심사도 다르고 대화가 안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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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생각이랄까. 이 심리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중학교 1학년이 된 언니가 초등학생 6학년인 수준이 안 맞는다며 더 이상 같이 놀아주지 않으려는 심리와 비슷하다.
어린 시절부터 애어른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와서였을까. 화장품, 외모 등에 관심이 많은 또래와는 관심사가 너무 달라 대화에 끼기가 힘들었다. 선배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어쨌든 또래나 후배들과 있을 때보다는 조금 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선배들과 만나 노는 것을 더 좋아하고 편안해했던 것 같다.
이렇게 포장했지만 사실 나란 사람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부심'이라고 해야 할까. 자아가 강한 사람이다. 자기애도 강하고 말이다. 좋게 말하면 자기애와 자아가 강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전부 다 시시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기질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무의식의 깊은 곳에는 '너랑은 수준이 안 맞아서 못 놀겠어'라는 생각이 강했고, 그런 생각으로 인해 두루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마음속 깊이 친했던 사람은 소수였다.
소위 '내가 젤 잘 나가'라는 생각이 팽배하던 그때 후배들 중에 내 눈에 유독 띄는, 내가 인정(?)하는 후배 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다른 후배들과는 좀 달라 보였고 언젠가 큰 일(?)을 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려는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여름 방학을 앞둔 그때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던 것이다.
사실 최근에 이 장면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었다. 그냥 그 장면의 내 모습이 너무 꼰대 같았다고나 할까? 겨우 한 살 차이에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다고 그녀에게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저런 경우도 있을 수 있으니 이렇게 해 봐.라고 내 멋대로 조언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솔직한 심정으로 정말 부끄러웠다.
내가 뭐라고,
그깟 경험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사람은 누구나 제 잘난 맛에 살지만 정말 실력을 갖춘 고수는 산속에 들어가 숨어 지내면서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며 묵묵히 무공을 연마하는 무림의 고수처럼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나는 정말 얕은 지식과 경험으로 세상 모든 것을 이미 다 아는 냥 그렇게 떠들어댔다. 물론 지금도 그런 모습이 순간순간 나오고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단지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모습이라면 그땐 그런 모습으로 내가 떠들고 있는지 몰랐고, 지금은 그런 꼰대 같은 모습으로 얘기하고 있음을 알고 적절한 때에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와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곧 꼭 만나자고 했다. 과연 다시 만나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이번에 만나게 되면 십여년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이 들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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