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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박지나 ]



아빠는

결과 중심적인 사람이고

일에 대한 보람과 성취는 통장에 들어오는 돈으로 결정되는 사람이고

일이라 함은 주 5일 9-6시 고정적으로 안정된 직장을 다니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고

좋은 일은 돈을 많이 주는 일인 사람이다.


나는 내 나름 잘 살고 있는데 계속 잘 살아라라고 자기 기준을 들이대고

좋은 곳에서 강의 하고 왔다고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이야기를 하면

강의료는 얼마나 주는지, 고정적으로 강의를 하는지, 정규적인지 비정규직인지 물어보며

내 기쁨을 엉망으로 만들고 유능함을 무능함으로 바꾸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설 연휴를 맞아 본가로 갔습니다.

여느 때처럼 아빠는 걱정과 염려로 하는 조언이라고 생각하지만, 듣는 저는 잔소리와 참견의 일방적인 소통이라고 받아들이는 대화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어요. 아빠의 온갖 공격에 요리조리 피하다가 답답함이 목 끝까지 차올라


'바쁘다고 할걸 왜 왔을까' 


후회가 밀려오는 찰나 거실 테이블에서 책 한 권을 봤습니다. 평소 책을 즐겨읽는 양반이 아닌데 뭔 책인가 싶어 살펴봤더니 너 잘 왔다며 책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시네요. 엄마는 아빠만큼 그 책에 흥미를 느끼지 않으셨나 봐요


이래라저래라 질문과 공격이 난무하는 잔소리보다는 책 내용에 대해서 대화하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고 아빠가 무슨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저는 아빠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어요. 사실, 들으면 들을수록 제가 좋아하는 분야의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당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저에게 자세까지 고쳐 앉으며 책 이야기를 신나게 합니다.


책은 영적 초월을 한 도인들에 대한 자서전이었어요. 어린 시절 도인을 만난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는 아빠는 이런 도인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며 긴 이야기를 해요. 옆에 있던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릴 한다며 비웃었지만


영성에 관해서는 저도 관심이 많은 부분이고 평소 책도 읽고, 실제 수련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빠가 이런 데 관심이 있다고? 놀랍기도 하고 그 아빠에 그 딸이구나 싶어 제가 왜 영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고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어요. (여기서 영성은 특정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종교적인 영성이 아니랍니다)


저는 심리학 중에서 상담 전공이지만 자아초월 심리학에 관심이 굉장히 많아요. 관심 분야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어도 정보가 없는 이들에게 간략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 두루뭉술하게 대화를 하거나, 자아초월 심리학 전공자인 분들과만 대화를 하는 시간이 많았어요. 정보가 없어서 모르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서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킨 뒤 대화를 하는 건 상상만 해도 너무 피곤하거든요.


그런데 전혀 생각 못 한,

심리학은 돈도 안되는데 왜 하는 거냐는 둥 독서를 좋아하지 않고 자아실현보다 현물을 쫓는다고만 생각했던 아빠와 명절 연휴 저녁에 마주 앉아 책 한 권을 시작으로 자아초월에 대해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니!!

집단상담이나, 함께 공통분야가 있는 상담자 선생님들과만 가능했던 대화가 집에서 가족과 할 수 있다니!!

길지 않은 그 시간이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꿈같았어요.


그리고 드디어 한 달에 몇 명의 내담자를 만나고, 몇 번의 강의를 나가서 얼마를 벌고 있는지가 아닌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속 깊은 대화를 한참 나누게 되었어요. 39년 중 가장 마음이 편하고 가장 즐거운 아빠와의 대화였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재밌고 즐거운 날들이 많았지만 이번 대화는 아빠의 딸로서도, 인간 박지나와 박상칠의 만남이기도 한 대화였던 것 같아요.



우리는 가족이라서 당연히 서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서로를 가장 위해준다고 착각을 하지만 사실 종잇장만큼이나 얇지만 또 벽만큼이나 두꺼운 견고한 막이 있어요.

그 막의 종류는 환경과 개인차에 따라 다르겠죠


저는 아빠에게 '불신'의 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빠에게 느끼는 불신은

'아빠는 나를 온전히 알아주지 않는다'라는 불신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 대한 질문을 하거나, 저의 안부를 물어올 때면 늘 '그냥 좋아요'라고 가볍게 흩날리듯 말을 했어요. 그 흩날리듯 가벼운 말을 들은 아빠는 제가 가볍고 흩날리듯 일을 하고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저에 대한 걱정은 잔소리가 되고 잔소리는 참견이 되었고, 그 잔소리와 참견은 불신이 되어 둘 사이의 막은 더욱 견고해졌을 거예요. 그리고 그 견고한 불신의 막은 한 권의 책으로 시작한 공통된 관심분야로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것 같네요.


39년의 견고함은 단단했지만

가족의 힘이랄까요? 몇 시간의 대화가 그 견고함을 부드럽게 만들었어요. 아빠는 지금처럼 계속해서 저를 걱정하고 잔소리와 참견을 하시겠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아빠의 질문에 깊은 한숨을 쉬며 불신의 마음으로 대화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어떤 부모인지, 어떤 마음에서부터 걱정과 염려가 생겨났는지 잔소리와 참견 뒤의 참 모습을 이제는 다 알게 됐거든요. 저에 대해서 분명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의 대화를 하겠죠.



가족이라서 대화가 어려운 건 사실이에요. 모양은 다르지만 상대를 위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벽이 견고하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벽을 오고 가는 방법만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39년간 서로를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빠와 딸이 투닥거리며 싸우다가 테이블 위에 있는 책 한 권으로 이렇게 깊은 라포가 형성이 되어 처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가족과의 대화 문제는 어쩌면 내 가족이 나를 사랑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닌 우리가 얼마나 라포 형성이 잘 되어 있는가의 문제이지 않을까 싶어요


대단한 주제로 가능한 깊은 대화를 기대하고 기다렸지만 사실 정말 깊은 대화는 눈앞에 있는 작은 사물로도 시작할 수 있는 게 가족의 대화가 아닐까요?


기회가 된다면

용기가 있다면

사소한 눈앞의 것들로 대화를 한 번 해보는 게 어떨까요?

여러분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 책 뭐야?"





:) 여러분은 가족 사이에 어떤 막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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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1-27 18:27:40
  • 수정 2023-02-08 19: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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