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다연
[The Psychology Times=양다연 ]
영화 «Life of Pi(파이 이야기)» 포스터(출처: 구글 이미지)
겨울방학의 절반 이상을 넷플릭스를 보며 지냈다. 국적과 장르를 불문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예고편을 보면 고민없이 재생버튼을 눌렀는데, 특히 미국 영화가 많았다. 하지만 너무 폐인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고 싶었고, 결국 ‘자막을 켜놓되 귀를 쫑긋 세워 영어도 공부하자’는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OTT 서비스를 만끽하다 발견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번역이 굉장히 초월적이라는 점이다. 영어를 곧이곧대로 번역하지 않고 한국인의 정서나 발화 습관에 맞게 번역을 해서 직역을 했다면 이상했을 문장을 자연스럽게 바꿔놓았다. 영화 뿐만 아니라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매체의 번역은 다 그런 식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고 나도 원래 알고 있었던, 신기할 것 하나 없는 당연한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졌던 이유는 책을 읽으면서 이와 정반대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2학년 영어 수업에서는 영어 원서를 교재로 사용했었다. 같은 자기개발 서적부터 나 같은 소설까지 장르가 굉장히 다양했는데, 책만 펼치면 공부를 할 마음이 싹 사라진다는 건 똑같았다. 그래서 항상 원서와 함께 한글로 번역이 된 책까지 두 권을 구매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책의 번역이 상상 이상으로 정직하다는 것을 알았다. 원서에 있는 단어 하나조차 무시하는 일이 없어서 ‘이건 좀 융통성이 없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심할 정도로 정확하고 빈틈없는 번역 덕에 영어 원서를 내팽개치고 한글 책으로만 공부를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시중에 파는 영어 문제집의 답안지가 ‘한글인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평가를 많이 받곤 하는데, 책은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을 뿐 사실상 번역을 하는 방식 자체는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단 한 단어도 놓치지 마라!’는 것이 번역가들의 좌우명일 게 분명했다.
영화 «Life of Pi(파이 이야기)» 포스터(출처: 구글 이미지)책과 영화가 꽤 다른 특징을 가진 매체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번역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나타나는 정확한 이유가 궁금했다. 논문 몇 편의 결론을 참고하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겠지만 그 내용이 맞는지 직접 느껴보고 싶어 영한 번역이 된 책과 영화를 하나씩 골라서 보았다. 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고등학교에서 수업한 원서 중 하나였는데 내용이 재미있어 시험이 끝나고도 계속 읽었던 책이다. 물론 번역본도 우리집 책장에 아직까지 꽂혀 있었다. 게다가 이 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인 «Life of Pi(파이 이야기)»가 2012년에 개봉했었기 때문에 책과 똑같은 내용을 영화로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집에 있던 원서와 비교해보니 역시 한글책은 4년 전에 느낀 그대로 빈틈없고 꼼꼼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나 맥락은 옮긴이가 괄호 안에 풀이를 해놓아서 다른 문화권의 책임에도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는 극적인 연출과 색감에 시선을 빼앗겨 대사에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자막만 읽으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주석이나 괄호가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여전히 영어 대사를 직역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미리 고백하자면 책과 영화, 논문을 보고도 엄청난 발견이나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다. (혹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내가 아는 게 없어 보이는 것이 없었을 수도 있다!) 번역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이유를 조금 더 전문적인 용어로 알게 된 정도다. ‘책은 문어체고 영화는 구어체니까 그런 거겠지’를 ‘인쇄매체 텍스트는 선형적이고 영상매체 텍스트에는 자국화 전략이 사용되기 때문이다’라는 멋진 언어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기존의 생각이 조금 바뀌긴 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나에게 번역이란 ‘이 나라의 말과 글을 저 나라의 말과 글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2. 이 생각은 틀렸다. 왜냐하면
3. 첫째, 번역은 서로 다른 국가의 ‘말과 글’을 일대일로 대응하여 바꿔치기하는 그런 단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4. 둘째, ‘언어’는 한 나라의 문화 안에 속한 하위 항목이다. 그러나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를 담고 있기에 문화의 상위 항목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번역은 문화를 담으면서 문화에 담겨있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다.
5. 셋째, 작품의 장르적 특성이나 번역가 개인의 성향 등 번역에 영향을 끼치는 다른 요소가 생각보다 많다. 작품과 함께 번역가를 향한 혹평 또는 호평이 함께 오르내리는 이유다.
이외에도 세세하게 알게 된 새로운 정보들이 몇 가지 있다. 책이나 잡지 같은 인쇄 매체의 번역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특징을 찾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한 권, 한 권마다 가지고 있는 주제, 전개 방식, 어투 등이 상이해서 ‘글로 적혀있다’는 아주 작은 특징은 고려해야 할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또 전자 기기의 사용이 급격하게 많아지면서 독자들의 읽기 습관, 사람들이 글자에 집중하는 정도 등이 바뀌었다는 내용도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동일한 과목의 교수 방법, 교제 제작 방법 등이 달라지는 것처럼 번역도 그 영역 안에서 여러 방식과 이론이 변화해왔음이 느껴졌다.
영화 «Life of Pi(파이 이야기)» 포스터(출처: 구글 이미지)탐구인듯 탐구 아닌 탐구 같은 이 애매모호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조금 허무한 느낌이 들긴 한다. 그러나 사실 가장 기쁜 점은 하나의 작품을 원서와 번역본, 영화로 모두 접했다는 것이다! 책 는 시점과 서술자가 챕터마다 변하는 구성이기 때문에 ‘오잉? 이건 또 무슨 소리야?’하면서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을 수 있었다. 영화 «Life of Pi(파이 이야기)»는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연출된 모든 장면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분명 CG에 굉장한 돈을 들였을 것이다.) ‘파이 이야기’처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세상에 나온 작품들이 많다. 다음에는 번역에 더해 내용, 연출 등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탐구해 볼 예정이다.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