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예린
[The Psychology Times=강예린 ]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해 한참 손가락을 쥐었다가 폈다가 반복했다. 낮이라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이 노트북까지 닿았다. 글씨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헤어질 결심. 헤어지는 것이 결심이 필요한 일인지, 만나는 게 더 결심이 필요한 일인지. 미묘한 지점에서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헤어질 결심의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한참 그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잔잔하게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사실 지독한 기대감에 비하면 첫 감상이 만족스럽지 못한 영화. 그리고 곧 다시 보게 되는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의 송서래는 그 결심에 마침표를 찍지 못해 바다로 떠났지만 나는 그 바람에 다시 서래가 보고 싶었다.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서툽니다. 송서래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계속 울리는 기분이었다. 아직 한국말이 서툴면서도 자신의 마음에는 마냥 진실한, 나와는 정반대인 이 여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했구나.
헤어질 결심 스틸컷 <이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
신기하게도 박찬욱 감독 손을 거친 작품들이 그랬다. 이해가 되지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아름다웠고, 조심스러웠다.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작품들을 처음 볼 때는 긴 다짐이 필요했지만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은 없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토록 사랑은 때를 가리지 않고 몰려왔다. 하염없이 파도처럼.
언젠가 권태감에 빠져 어딘지 모를 공허함을 채우려 사랑을 찾았다. 실패해도 상처를 모르는 것처럼 다시 찾아다녔다.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은 애틋한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사랑. 그 단어가 가지는 달콤함만 가지고 싶었다. 그 무렵에 조금은 불편하고, 휘청거리면서도 한없이 아름다운 이 작품을 마주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이 영화를 이토록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 사이에서는 작품 내에서 해준이 의문을 가진 것처럼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언급된 적이 없다. 사랑한다는 말이 꼭 사치처럼 느껴져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사랑을 잊은 적도 없었다. 작품 외적으로 나는 언어가 통역이 되기만을 기다리게 하는, 그래서 더 오래도록 바라봐야 했던 송서래를 사랑했다. 작품 내적으로는 해준과 서래가 사랑했고. 지금, 여기서. 익사해도 기꺼울 정도로.
서래가 해준의 잠을 걱정하는 일은 말 없는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표나 다름이 없다. 사실 자신을 두고 먼저 잠드는 게 참 외로운 일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잘 자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랑인 탓이다. 서래의 끼니를 걱정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단일’한 엉터리 중국요리를 해주는 해준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란 마땅히 그런 것. 다른 사치를 부리는 일이 아니라 그저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그렇게 그 사람의 세상이 따뜻하게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헤어질 결심 스틸컷 <서래에게 요리를 만들어주는 해준>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언젠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거부 반응을 나타내곤 했다. 이건 내 좁은 시선에서 기인한 문제였다. 사랑이 연애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서부터는 마음껏 사랑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빠진 사랑이 바로 <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인 셈. 이 영화를 집필한 정서경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글을 쓸 때, 캐릭터의 결점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고.
마땅히 품고 사랑할 수 있는 결점. 그걸 품는 일은 큰 용기이고 결심이지만, 사랑한다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다. 송서래의 결점은 ‘버리지 못하는 것’.
버리지 못한다는 건 평생 사랑하며 산다는 말과도 같았다. 연인이 아니라도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고, 또 오래도록 사랑할 수도 있었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좋았다. 계속, 계속.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또 줄곧 품어줄 것 같으면서도 마음껏 서글퍼도 괜찮은 공간인 바다를 사랑했다. 이 영화를 만나면서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된 것 역시 고요하고 서글퍼서 아름다운 바다였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다. 그 마음은 한편으로는 잔잔하다. 가끔은 휘몰아치면서 온다.
사람은 소중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잘 버리지 못한다. 추억, 기억, 사진… 그리고 동시에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한다. 조금 더 나은 일상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아마 그런 측면에서 각자는 송서래의 결점을 가지고 살고 있을 것이다. 어떤 물건을, 또 순간의 사랑을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구석까지 사랑하게 되는 시간도, 사람도 기꺼이 존재한다. 내가 서래의 말이 번역기를 통해서 해석되는 순간을 설레며,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면서도 기다렸던 것처럼. 어깨를 무겁게 하는 세상이 각자만의 언어로 부드럽게 번역된다면 오늘도 조금은 사랑하면서 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여전하다. 오늘도 헤어질 결심을 기꺼이 하면서도 용기를 내 만날 결심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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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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