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다연
[The Psychology Times=진다연 ]
필자는 관계 앞에 ‘건강’이라는 수식어를 자주 붙이곤 한다. ‘건강치 못한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직감적으로 느껴져서, 반대로 ‘건강한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정의내리고 고민하게 된다. 나를 갉아먹고, 불안하게 하고, 마음이 너덜너덜해지고, 내 감정에 스스로조차 솔직하지 못한, 그런 관계를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접했을 테다. 그러나 누가 봐도 ‘도망쳐’를 외치게끔 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직장 등의 이유로 필연적일 수도 있지만, 연인이나 친구처럼 충분히 끊을 수 있는 관계를 놓지 못하는 모습은 보는 주변 사람까지 답답해지게 만든다. 이렇게 마음에 해로운 관계를 이어가는 심리는 무엇일까? 어떤 알량한 감정을 위해 우리는 자신 쪽으로 날을 세운 관계의 칼날을 잡고 있는 것일까?
중독의 첫 단추, 관계의 결핍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는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하며, 그만큼 욕구의 큰 비중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관계는 항상 내 곁에, 원하는 방향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채워지지 못한 관계에 대한 욕구는 결핍으로 자리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고통을 ‘문명 속의 불만’ 중 하나라고 표현했다. 그는 현대 문명사회 아래에서, 세 방향에서 오는 고통이 우리를 늘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첫 번째 방향은 언젠가는 문드러져 없어질 자신의 육체이며, 두 번째 방향은 늘 자신을 공격해오는 외부 세계, 마지막 방향은 타인들과의 관계이다. 그중에서도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으로 꼽았다. 또한 관계의 고통이 사족이 아닌, 살아가면서 나머지 두 고통 못지않게 불가피한 것이라 강조했다.
관계의 결핍은 삶에 공허함을 주는 가장 큰 요소이다. 인간은 그 허전함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게 되는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대리물' 이라고 부른다. 모든 욕구를 늘 충족시킬 수 없기에 대리물이 어느 정도 삶의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리물로 계속 결핍을 충족시키다 보면 중독의 길로 빠지게 된다. 즉, 관계의 결핍이 중독의 첫 단추가 되는 셈이다.
중독에는 행위 중독, 약물 중독과 같은 생물학적 중독뿐만 아니라, 반응, 관심, 위로 중독과 같은 관계 중독도 존재한다.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공허함을 관계, 그 자체로 채우는 것이다. 이것은 관계를 향한 욕구의 해소가 절대 아니다. 건강한 잡곡밥 대신 과자나 아이스크림으로 매 끼니를 해결하는 것과 같다. 잠깐의 허기는 달래질지언정 건강을 망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관계중독은 표면적 징후가 명확하지 않아서, 생물학적 중독에 비해 예후도 나쁘고 결과도 치명적이다. 그러나 모든 중독은 금단증상이 있다. 관계 중독의 금단현상은 상대의 부재에 공허감, 우울증, 공황장애 등 심리적 금단 증상이다. 관계를 정리하려 해도 더 이상 본인의 의지로는 상대를 끊을 수 없는 단계가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관계중독인지 알아차리려면 이러한 금단현상을 느끼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공의존과 관계중독
‘관계중독’은 앤 윌슨 셰프(anne wilson schaef)가 제시한 ‘공의존’ 개념과 함께 등장하였다. 셰프는 알코올 중독자를 돌보는 배우자가 보이는 독특한 심리에서 공의존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가 여러 방면에서 배우자에게 고통을 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배우자가 중독자를 간호하고 돌보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를 상대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것으로 보았다. 현재의 공의존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붙잡혀 피할 수 없는 상태로 정의가 넓어졌다. 즉, 타인을 향한 과잉된 의존에 빠져 그러한 관계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관계에 대한 중독 상태인 것이다. 인정 받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이 공의존의 가장 큰 특성이다. 아래에 구체적인 공의존의 특성을 나열하였다.
(1) 자신도 힘들면서 상대를 계속 돌보려고만 한다.
(2) 남들보다 매우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3)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억압한다.
(4) 특정한 사람이나 관계에 대해 강박적 확신을 두고 있다.
(5) 자발적으로 상대의 통제를 받거나 반대로 상대를 통제하려고 한다.
(6)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고 한다.
(7) 자기 삶에 대해 가진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상대에 의존하려고 든다.
(8)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거나 남들과의 의사소통에 매우 서툴다.
(9) 남들보다 미약하거나 불안정한 삶의 원칙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다.
(10) 과도하게 주변을 경계하고 타인을 신뢰하지 못한다.
(11) 분노에 익숙하지만, 갈등관계를 피하려고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자신의 가치를 타인에게서만 찾을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 기사에서 ‘거짓 자기’의 개념을 통해 공의존, 그 기저의 심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지난기사
참고문헌
달린 랜서. (2018). 관계 중독(수치심과 결별하고 공의존에서 탈출하기). 교양인.
박수경. (2022). 관계중독(집착, 스토킹, 폭행, 불륜의 또 다른 이름). 가연.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dy86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