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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루비 ]


우리반 아이들이 만든 부엉이(업사이클링 활동)

기간제 경력까지 합하면 어느새 나는 11차 교사라고 할 수 있다. 8주간의 교생실습을 거쳐 기간제 6개월을 지나 2010년에 정식으로 첫 발령 나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학문이 아닌 진짜 수업이 뭔지 배웠던 첫 수업실습,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격렬한 감정의 파도를 겪어야했던 기간제 시절, 그리고 2010년에 만난 산촌마을에서의 3년의 시간 등. 힘들기도 했지만 나를 내동댕이쳐서 많은 것들을 배워갔던 시간들이었다.


첫 해에는 시골의 6학급이라 업무량도 상당했고 1년에 3번 있던 공개수업, 연구학교 평가 준비 등으로 밤 10시에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내가 초짜라는 이유도 한 몫 했겠지만, 매일 밤늦은 퇴근 시간으로 어머니가 부쳐주신 김장 김치를 부엌에서 그대로 썩힌 일도 기억이 선명하다. 그 정도로 집안 살림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차도 없는 나이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옆 반 선생님께 부탁하며 아이들을 집에 태워줘야 하는 일까지 신경 쓸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 때 당시 11명의 반 제자들과 보낸 시간은 행복했었다. 비록 MB 정권 아래에서 일제고사라는 미명아래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를 장애진단을 내려 특수반에 보내야한다는 교감선생님과 싸울 때 어떤 동료 선생님도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에 좌절했지만(의학드라마 하얀거탑을 보면서 이겨냈다...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최도영과 장준혁의 갈등...) 그래도 되돌아보면 선생님들 덕분에 힘을 냈던 시간들도 많다.


그 다음해에는 첫 해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욱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도내에서 유일한 과학시범교육청 지역에서 과학 업무를 맡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고, 6명이었던 1학년 아이들도 정말 예뻤다. 1명이라도 전학가면 복식학급으로 바뀐다는 지침에 어떻게든 아이들을 붙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걸 떠나서 아이들은 내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천사들과 같았다. 바른 자세 수업 시간에 각 잡고 뻣뻣하게 차렷 연습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종례 시간에 화장실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은 아이를 찾아갔을 때는 그 황당한 모습에 당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동네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마트에서 학부모님을 만날 때 “○○ 때문에 요즈음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아이들은 내게 많은 사랑으로 보답해주었다.


그 다음해에도 22명의 3학년 아이들과, 다른 지역으로 옮겼던 그 다다음해에는 6학년 15명과 아주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아이들로부터 교원만족도조사에서 만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5년차 때 도시의 큰 학교로 나오면서 고비가 닥쳤다. 4년 간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동료 선생님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기도 했다. 업무적으로 태클을 걸거나 내 사생활을 비난하며 괴롭혔고 나는 그 일로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상태였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일을 잘하면 따돌림을 받는구나’라는 무의식적 사고가 각인됐다. 그래서 5년차 때 새로 만난 학년 부장님이 지금까지 상 받은 게 몇 개냐고 물어봤을 때 5개가 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없다라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날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지난 4년과 다르게 정확히 칼퇴근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점차 아이들과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때는 정식 발령 후 처음 겪는 일에(기간제 때도 힘들었지만 그 기억은 깡그리 잊었다) 그냥 내가 맡고 있는 반 아이들이 전부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아무튼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 조금만 화나면 욕하고 소리 지르는 아이, 청소 시간에 도망가는 아이, 옆반 아이를 빵셔틀 시키는 아이, 지속적으로 왕따를 주동하는 아이, 수업 시간에 학원 숙제 하는 아이 등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뤄야할지 몰라 좌절했었다.


그 다음해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다다음해에도. 학교폭력위원회가 열리고 피해 학생 학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폭언 및 민원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니깐 하루하루 출근길이 지옥이고 교통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 시간들을 버티고 견뎠는지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결국 나는 다시 시골의 작은 학교로 돌아왔다. 도시의 큰 학교에서도 잘 지내는 선생님들을 보면 부럽긴 하지만, 교사 커뮤니티에 하루에도 몇 번씩 출근하기 싫다, 아이들이 힘들게 한다, 교권보호위원회를 열고자 한다, 방학만 기다린다라는 선생님들의 글이 올라오는 걸 보면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아직 나는 거칠게 무장한 서른 명 남짓의 아이들을 통제와 규율로 다룰 힘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학교에서 통제와 규율이 아닌 학생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개별화 교육에 초점을 맞춰 지도하고 있다. 수학 수준이 다른 아이들을 위해 따로 공부할 거리를 준비해 가르치고, 학생 개개인의 학습 속도에 맞춰 수업을 재구성하고, 수업과 평가를 일원화하고, 독단적인 교육을 피해 학생들의 의견을 최대한 경청하고 있다. 대도시의 큰 학교에서는 사실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노력은 해봤지만 학교 행사에 치여, 학부모 민원에 치여, 동학년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라는 이유 등으로 교사 개인의 자율권은 보장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여하튼 요즈음 나는 정말 행복하다. 학생들과 하고 싶은 동아리 활동으로 음악 감상 교육, 글쓰기 교육, 독서교육, 감정나눔활동도 실컷 하고 있고 최대한 내 자율권을 보장받고 있으니 말이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너무 좋다고 말해주고, 동료 선생님, 교장선생님도 최대한 행·재정적으로 지원해주시고 즐겁고 화합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당분간은 지금 우리반 아이들과 행복을 지어가며 내 실력을 키우고 언제 어디에서나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교사가 되리라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서른명이 넘는 교실에서도(교사들은 학급당 인원수를 줄여야한다고 요구하지만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개별 맞춤형 교육이 가능해질 수 있게끔 성장하고 싶다. 화난 아이, 아픈 아이, 공부에 흥미가 없는 아이, 독서 시간에 장난만 치는 아이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슈퍼맨 교사…….를 꿈꾼다. 나는 지금 참 행복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것이다. 때론 눈물짓는 날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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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6-08 22: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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