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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진다연 ]


이전 기사를 통해 우리는 공감해 관하여 ‘로든베리 가설’을 살펴보았다. 로든베리 가설을 요약하자면, 공감은 기질적 특성으로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하나의 반사적 작용 중 하나로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가설이 틀렸음을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었음도 함께 알아보았다.

 


이제 인간 본성에 관한 과학은 마침내 고정주의를 떨쳐내게 됐다. 우리는 고정되었거나 얼어붙은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뇌와 마음은 일생에 걸쳐 변화한다. 변화가 더디고 잘 감지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움직인다.

 

우리는 이 개념은 ‘심리학적 유동성’이라고 부른다. 유동성이 누구나 어떤 것이든 다 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사람과 똑같아질 수 없다. 우리가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예민하며, 얼마나 친절할지 결정하는 데는 분명 유전자가 하는 역할이 있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의 특성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인간 본성은 유전과 경험이 더해져 형성된다. 여기서 논쟁할 수 있는 사항은 각 부분이 어느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가이다. 


다시 지능을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의 유전자는 그에게 지능이 높거나 낮을 상대적인 성향을 부여한다. 이를 그 사람의 ‘설정 값’이라고 불러보자. 그러나 각각의 사람에게는 그 값을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범위도 존재한다. 사람의 지능은 누구에게 양육을 받았는지, 어떤 세대에 태어났는지에 따라서도 높거나, 낮게 나타난다.


고정주의자는 한 사람의 설정 값에만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얼마나 똑똑하냐고 묻는다. 유동주의자는 설정 값이 변화할 수 있는 범위에 초점을 맞춘다. 고로 그 사람이 얼마나 똑똑해질 수 있냐고 묻는다. 이때까지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에서 고정주의는 합당한 정도 이상으로 과도하게 지배력을 행사해왔다. 그 결과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지에 대해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 해왔다.


유동주의자는 설정 값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사람들이 의미 있는 여러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감과 친절함이 부분적으로 유전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여전히 경험과 환경, 습관 같은 비유전적 요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여지도 있다. 경험이 공감의 양상을 결정한다는 사실은 수십 년간 쌓인 증거가 이미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의도 아래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겪을 경험을 선택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목격한 변화들은 모두 우연히 일어났으며, 사람들은 더 배려하지 않기 위해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피해자들이 피해를 입은 것도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가족을 뜻대로 선택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자신의 유전자를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공감이 경험에 의해 더 커지거나 줄어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경험을 매번 선택할 수 없는 우리는 과연 자력으로 공감의 크기를 의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가 질문이 될 차례다.


여기서 캐럴 드웩(Carol Dweck)의 ‘마인드 셋(mind set)'이라는 개념을 꺼내보자. 그는 수십 년 동안 ’마인드 셋‘, 즉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에 대해 믿는 바를 연구해왔다. 결론적으로, 단순하게 자신이 공감의 정도를 변화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믿는 것 그 자체가 공감 정도의 변화를 일으킨다. 즉 유동주의를 기반으로 한 믿음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앞선 설명과 같은 맥락에서, ’일상의 고정주의자들‘은 지능이나 외향성 등 심리를 이루는 요소가 변할 수 없는 기질적 특징이라고 믿고, 모든 사람들이 초기 설정 값에 따라 정의 되는 것이라 본다. 반면 ’일상의 유동주의자들‘은 심리의 요소들을 기술처럼 여긴다. 현재 특정 수준의 지능을 지닌 것은 맞지만, 그 수준은 달라질 수 있으며 바꾸려 노력하면 더 잘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기저에 두는 것이다.

 

마인드 셋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 특히 어려운 상황에서 나오는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일련의 연구에서, 캐럴은 지능에 대한 학생들의 마인드 셋을 측정했다. 이후 학생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하고, 나중에 그들에게 잘 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정주의 학생들은 자기가 잘하지 못한 원인을 능력 부족 탓으로 돌렸다. 고로 보충교육을 거정하고, 갈고 닦을 기회를 회피했다. 반면 유동주의를 지닌 학생들은 추가로 배울 기회를 받아들였다. 이는 충분히 실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동 주의적 관점은 비단 공감능력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모든 내적인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여기서 왜 저자가 공감능력을 ‘지능’이라 했는지 다시금 되짚어 보아야 한다. 공감은 지능이기에, 지능만큼 사회에서 사람들과 원활히 상호작용 하는 데에 필요하며, 지능처럼 설정 값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또 지능처럼 노력하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공감 ‘능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제한성에 갇히지 말자. 우리에게는 항상 한 칸 더 전진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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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자밀 자키, (2021), 공감은 지능이다, 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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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6-23 23:4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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