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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 소설 <나를 보내지 마> 속 인간 존엄성과 책임
  • 기사등록 2023-07-29 01:08:05
  • 기사수정 2023-07-29 0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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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조수아 ]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커다란 ‘진화’를 하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몇 세기가 흘러 21세기인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 복제인간, 포스트 휴먼과 같은 말들은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늘 떠오르는 단어이다. 어쩌면 이러한 것들이 멀지 않은 미래에는 인간과 같은 형태로 우리와 공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기대되는 인류의 발전에 관한 연구와 논의도 활발한 한편, 그 속에서 과연 기술과 인간이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도 늘 함께 따라오는 논제이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는 클론과 기증을 중심 소재로, 인간의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클론들이 ‘헤일셤’이라는 공간의 안과 밖에서 겪는 다양한 감정과 사건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설로, 4차 산업혁명 이후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 존엄성이 가져야 할 의미는 무엇일지 등에 관해 고찰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을 느끼는 기술그리고 인간존엄성


소설은 캐시, 루스, 토미 세 인물의 관계와 세 인물이 겪는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품의 화자인 캐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평판이 좋은 간병사로 일하고 있다. 캐시는 간병사로 일하던 중 기증자가 된 친구 루스와 토미를 만나며, 과거 헤일셤에서의 삶을 추억하고 회상한다. 이 과정에서 해당 세 인물이 인간과 전혀 다를 것 없이, 사랑, 우정, 슬픔, 동정, 두려움 등의 여러 감정을 온전히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처럼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클론들, 즉 기술에게 인간 존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해 고찰해 보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 존엄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인간’이란 “다른 동물에서 볼 수 없는 고도의 지능을 소유하고 독특한 삶을 영위하는 고등동물”이라고 정의된다. 이에 따라,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재 가치가 있으며, 그 인격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각자의 생각과 가치관이 존재하며, 헤일셤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 여러 지식을 배우고 습득하며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 이러한 소설 속 클론들의 삶이 인간이 말하는 ‘인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는가? 헤일셤에서의 이들의 삶은 인간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보인다. 인간이 느끼고 배우는 것들을 똑같이 느끼고 배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은 그렇다면 인간 존엄성이 이들에게도 보장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고찰의 필요를 제시한다.

 



인정하지 못하는 인류와 결여된 책임감


소설 속 인류는 클론의 기증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클론의 존재를 부정하며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전에는 불치병이었던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등장인물 에밀리 선생의 이 말이 소설 속 인류가 클론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면서도 그들로부터 기증을 받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바로 인류의 기술에 대한 ‘책임감’이다. 소설 속 인류는 자신들의 병을 치료하고 연명하기 위해 클론을 만들어내고 이용하지만, 그 속에서 책임감 있는 태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인간이 발명한 기술로 직접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인격체를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초래한 결과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소설 속 인류의 이러한 태도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습과도 닮은 점이 있다. 원자력발전소와 인공지능, 핵무기 등의 첨단 기술을 활용한 결과물들은 인간의 안전과 편의를 위함이라는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오류나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어떻게 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아직까지 깊게 고민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렇듯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대 속에서 ‘편의’라는 이점 뒷면에 존재하는 문제를 우리 인류는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술을 통해 암을 치료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던 소설 속 인류의 모습처럼, 우리 또한 우리에게 편의를 가져다줄 기술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과 함께 존엄성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며 살아갈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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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가즈오 이시구로, (2009), 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2.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35955&cid=40942&categoryId=31611

3.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46159&cid=40942&categoryId=3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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