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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혜령 ]


2. 내 아이도 '타인'이다.


언젠가 지인이 해준 얘기입니다. 예민하고 밥 안먹는 세살 아이 때문에 하루종일 지옥을 경험했다가 잠들기전 아이의 사랑 고백에 천국에서 하루를 마무리 했다고 했어요. 거의 잠들기 직전의 아이가 엄마 품속을 파고들며 '따랑해 엄마.'라고 했다니 지옥이 다 녹아버렸지 않았겠습니까. 참 신기하죠. 조그마한 아이가 하루만에 엄마를 천국에 보냈다가 지옥을 보내기도 하니까요.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절대적인 우주에요. 학령기에 접어들면 또래 친구의 비중이 커지지만 그럼에도 부모라는 세계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주 크게 작용을 하죠.


그런데 그만큼 부모에게 아이도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는 사람입니다. 아이의 미소 한 번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가,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세상을 잃을 것 같잖아요. 이는 흡사 연인관계 같기도 해요. 사랑에 빠지면 온통 그사람으로 가득한 것처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마음이 요동치는 것처럼 말이에요.


맞아요. 우리는 육아를 하기 이전에 '사랑'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돌봄 아래에는 언제나 사랑이 깔려 있을 거에요. 그런데 이 지점에서 종종 아이가 '타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되곤 합니다. '내 아이' '나의 책임' 나아가서는 '나의 소유''나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자리잡아 아이와 과도하게 밀착되어버리곤 해요. 이 때문에 생겨나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은 우리가 보통 타인을 다룰 때와는 확연히 달라보입니다. "쟤는 도대체 왜저럴까" 하면서 남보다 더 이해를 못하기도 하고,  "내 아이인데 왜 이렇게 힘든거지?"  하며 자책하는 일도 생겨요.  그렇지만 이해가 안되고 힘든게 당연해요. 내가 아니거든요.


내가 낳아서 기르고, 나를 닮았고 내가 모든 것을 보살펴주고 있지만, 엄연히 '타인'입니다. 탯줄을 자른 순간부터 나와 분리되어 있는 내가 아닌 존재에요.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녀를 독립적인 객체로 인정하지 않아서 생기는 수많은 문제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사실은 아이를 키우는동안 무척 중요한 전제가 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지나치게 밀착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에 힘이 덜 들어가게 되겠죠. 무엇보다 육아를 하는 내 입장에서의 어려움과 다양한 감정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이 '타인'이라는 개념으로 아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단지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청소년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복잡한 문제들과 감정소모로부터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에요. 


그러니 조금 구체적으로 이해해 보도록 해요.


#타인은 나와 다른 욕구를 가진 존재

타인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존재' 즉,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실은 나 자신도 통제하기 몹시 어려운 게 현실이지만, '나'라는 세상을 돌보는 게 어려움의 영역이라면 타인은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어요. 완전히 별개의 우주이니까요.


이러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까운 관계는 가까운대로 먼 관계는 먼대로 잘 지내기 위해서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지요. 학창시절 친구관계는 항상 편하고 좋았나요? 회사생활 하면서 인간관계 쉬웠나요? 멀리 갈 것도 없지요. 가족과의 관계가 항상 편안하고 따뜻했나요? 지금 애인 혹은 배우자와의 관계는 늘 꽃길이기만 하고요? 아니죠. 인간관계는 본디 어려운 겁니다. 게다가 함께 동고동락하며 잘 살아간다는 건 기적에 가까워요. 그러니 적응이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해요. 공부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힘들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와 나는 다른 욕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나와 다른 욕구를 가졌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되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매순간이 욕구와 욕구간의 충돌이에요. 욕구는 그 사람을 굴러가게 하는 엔진같은 겁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엔진을 달고 있어요. 그건 내 아이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내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키우고 돌보고 잘지내려하니 힘들 수밖에요. 아이가 어린 시기에는 아무래도 아이의 기본적인 욕구만을 채우는데에도 힘이 달려 내 욕구를 돌볼 겨를이 없으니 매일매일이 피곤하고 지치겠죠. 그리고 돌무렵을 지나면 아이는 그저 수동적으로 돌봄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강아지에서 사람으로 변해가는 시점이죠? ㅎㅎ) 강력하게 표현하고 요구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니 양육자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이 생길 겁니다. 미운세살, 혹은 미운일곱살 같은 표현은 아직 덜 다듬어지고 논리가 없는 이 생명체를 어떻게든 사람으로 만들어보고 싶은 부모의 애환이 만들어낸 것 아닐까요?


게다가 아이를 돌보면서 부모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라 여기에서도 괴로움이 발생하죠. 저의 경우, 원래도 혼자 있는 시간을 무척 좋아했었는데요, 아이를 키우면서 '아 격렬히 혼자있고싶다!' 라는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그런데 동시에 '이렇게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두고 왜 나는 그렇게 혼자있고 싶어하는 거지?'라는 의문과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욕구에 맞추어 먹여주고 놀아주고 하다보면 당연히 내 욕구는 소홀히 될 수 밖에 없잖아요. 또 아이의 자아가 커지면서 다양한 욕구가 생겨나고 그에 따라 요구가 늘어나게 되는데( '내가내가 병'과 '싫어싫어 병'을 케어하느라 지치신분들 많으시죠?) 그런 것들을 받아주고 들어주는 데에도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겁니다. 내 욕구가 소홀히될 수록 용수철을 누르면 다시 튀어오르려는 것처럼 내 안의 욕구도 강하게 드러나고 싶어하겠죠. 그러니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마음 안에는 저처럼 '격렬히 혼자있고싶다.' 이외에도 언제나 '아! 격렬히 00가 하고 싶다!'  가 파닥이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사랑을 배경에 깔고 있더라도 타인의 욕구만 무한정 받아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도 안되고요.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조절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좀 더 어려운 시간이 될 수밖에 없겠죠.



#타인은 하나의 '시선'이 된다

또한 아이라는 타인은 하나의 시선입니다. 이 시선이 중요한 이유는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주는 큰 퍼즐조각이 되기 때문이에요. 사회심리학자 쿨리(Cooley)에 의하면, '나'의 정체성은 오로지 나 혼자 정의하는 게 아니라,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형성된다고 합니다. 이 개념이 바로 많이 알려진 '거울자아 이론'이기도 한데요. 타인을 거울삼아 내가 '나'를 인식한다는 거에요. 내가 '좋은 사람'이기 위해서는 타인의 눈 속에 내가 좋아보여야 하겠죠. 타인이 나에게 지지적이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봐줄 때 내가 나를 좋게 볼 가능성도 높아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끊임없이 '나'를 만들어 갑니다. 즉, 우리는 아이를 돌보며 아이의 눈에 비춰지는 내 모습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게 되는 거죠.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은 타인의 시선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가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 해요.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픈 이유는 그 때문이에요. 내 아이로부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못난 것 같을 때 우리는 괴로워집니다. 아무리 내가 낳은 아이라고 하더라도 아이 앞에서 수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때 더 자괴감을 느끼곤 해요.  아이의 시선으로 나를 계속 검열하게 되면서 마음은 더 피곤하고 괴로워집니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좋은엄마가 되고 싶어.'이런 생각을 안해 본 엄마가 있을까요? 제 안에도 그런 마음이 늘 있어요. 그런데 이 '좋은 엄마'는 누구의 시선일까요. 아마도 아이의 시선이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을거에요. 그러니까, '아이가 나를 좋은 엄마로 생각해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라는 거죠. 그런데 누차 말씀드리는 것처럼 아이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의 생각도 감정도 내가 정해줄 수 없겠죠. 그렇다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을 품은 한, 아이의 시선은 어떤면에서 감독관일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를 위하는 거라고 혼을 내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가 나를 싫어할까봐, 아이가 나를 형편없는 엄마로 볼까봐 어떤 두려움이 자리할 겁니다. 언젠가 아이가 커서 '엄마는 왜 나한테 이렇게밖에 못해줬어?' 하고 원망하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지 않나요.


이처럼 아이는 하나의 시선이자 나를 '좋은 엄마' 혹은 '못난 엄마'로 만들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이와의 관계는 쉬울 수가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정체성에서 '엄마' 의 역할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내가 엄마로서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 더더욱 괴로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워킹맘이 아니라 전업맘인데다가 '엄마'라는 역할에 완전히 몰두해 있을 경우 그렇겠죠. 엄마로서의 실수나 부족함이 '나는 형편없는 사람'으로 이어지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몰라요.  '엄마' 혹은 '아빠'라는 이름은 내가 가진 수많은 역할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나=엄마' '나=아빠'로 동일시를 해버리면 나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일이 잦을 거에요. 엄마, 아빠 역할은 아무리 정성을 더해도 쉽지 않은 자리니까요. 참 어렵죠?

아이의 시선은 엄마의 자아에 큰 퍼즐조각이 된다

이렇듯 아이를 돌보는 것은 단지 먹이고 재우는 것 이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는 과정인듯 합니다. 단지 일방적으로 돌봄을 주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나'라는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작용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한 것 같아요. 때로는 너무나 어렵고 조심스러운 육아. 단순히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보다, 또 '나는 아이를 사랑하니까 힘들지 않아' 라며 멘탈로 극복하기보다는 이렇게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이해하다보면, 나를 더 괴롭게 만드는 일을 줄일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나'와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타인'인 아이를 이해하며 함께해보려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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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1-21 22: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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