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리스본, 포르투갈
여행, 하면 우리는 설렘, 휴식, 힐링을 연상한다. 일상에서 벗어나 누리는 휴식과 힐링은 달콤하지만 대부분 소비에 머물고 만다. 여행이 소비적 여가를 넘어서 개인의 삶에 내적 진동을 일으킬 수 있을까? 눈에 안 보이지만 미세하게 일어나는 내적 진동이 있는 여행은 익숙한 시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나는 이 여행을 ‘조용한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시선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사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 시선을 바꾸는 여행이 가능할까? 자유여행, 특히 혼자 떠나는 여행이 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혼자 준비하고 떠나는 여행은 설렘만으로 가득하진 않다. 낯섦과 불안이 혼재하고 고생스럽다. 하지만 설렘과 불안이 함께 하는 여행은 잠재된 내면의 힘을 깨우고, 그 힘을 쓸 수 있는 근육을 길러준다.
나의 조용한 혁명은 스물두 살에 다녀온 45일간의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모든 게 재미있으면서 심드렁한 청춘이었다. 시간은 써도 써도 남았다. 규율이 가득했던 고등학교와 달리 자율이 넘치는 대학은 망망대해 같았다. 친구와 유럽 배낭여행을 가기로 의기투합했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여행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획일적이었다. 1세대 배낭여행자들에게 여행 바이블은 일본에서 발행된 가이드북을 한국어로 그대로 번역한 책이었다. 업데이트가 안 된 번역 안내서를 들고 여행길에 올랐다. 책 속 정보가 현지 정보와 달라서 이보다 더 헤맬 수는 없는 여행이었다. 무엇을 볼지 고민하기보다는 적은 경비로 살아남는 방법에 방점을 찍은 여행이었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배낭에 쌀, 참치 캔, 라면, 볶은고추장, 김 등 부식을 잔뜩 넣고 출발했다.
45일 동안 여행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해프닝은 다 일어났다. 여권, 항공권, 유레일패스, 카메라, 여행경비로 가져간 현금을 모두 잃어버리기도 했다. 주말에 마트와 동네 식당이 문을 닫는 소도시에서 먹을 걸 사놓지 않아서 쫄쫄 굶은 적도 있다. 마트와 식당이 전부 주말에 문을 닫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문화 충격이었다. 숙박비를 절약하기 위해 기차역에 침낭을 펼치고 노숙도 했다. 버스비가 아까워서 걷고 또 걸었다. 무거운 배낭은 여행 내내 시시포스의 바위였지만, 자고 일어나면 어깨 근육도 배낭 무게에 적응했다. 매일 낯선 도시, 낯선 길을 걸었다. 아니 헤맸다.
여름 성수기라 찜해둔 유스호스텔에 침대가 없는 일이 빈번했다. 그때마다 난감했다. 안락한 집을 두고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사서 고생하는 이유를 나도 몰랐지만, 본능은 낯선 환경을 잘 받아들였다. 친구와 나는 빠르게 적응했다. 경비도 아끼고 숙소 쟁탈전에서 해방되는 해결책을 찾았다. 밤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어둠이 내려오기 전에 우리는 현재 있는 도시에서 출발해서 밤새 가는 기차를 찾았다. 도시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기차를 타기 위해 도시에 갔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잠도 자고, 세수도 하고, 밥도 먹고, 쉬면서 에너지도 충전하는 만능 공간이었다. 날이 밝으면 덜컹거리는 좁은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기차가 정차하면 내렸다. 주로 작은 도시였다. 어떤 도시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도시도 가 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였으니까. 낯선 도시에 내려 구시가 중심까지 걸으면서 무엇을 할지 정했다.
이렇게 즉흥적으로 살 수 있는 나날이 또 있을까? 매일 즉흥성 안에서 나름대로 질서를 만들었고, 하루를 계획하는 데 익숙해졌다. 마음을 끄는 도시에서는 길게 머물고, 흥미가 당기지 않는 도시에서는 짧게 머물렀다. 이처럼 충동적이고 몸으로 하는 여행이 될 거라고는, 출발 전에는 상상도 못 했다. 자고 일어나면 걷고 또 걸었다. 해가 지면 피곤했고, 피곤해서 어디서든 잘 잤고, 생각은 단순해졌다. 매일 실수하고 헤맸고,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낯선 문화를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이 여행이 사치였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짧지 않은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내면에서 올라오는 진동을 느꼈다. 여행 전에는 몰랐던 진동이었다. 좌충우돌했던 여행에서 보이지 않는 자신감이 몸에 달라붙었다. 돌이켜 보면 첫 배낭여행에서 얻은 힘이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플랜 B로 이동하는 융통성을 얻었다. 힘들 때 등 돌려 도망치지 않는 원천이 되었다.
이 책을 기획한 이유는 해외 자유여행을 할 때 무의미한 실수는 줄이고, 의미 있게 ‘헤매기’를 바라는 오지랖에서다. 2019년에 한 후배가 두 딸과 남편에게서 한 달간 독립을 선언하고 유럽으로 혼자 배낭여행을 떠났다. 후배가 여행 준비하는 과정을 들으며 내 첫 유럽 배낭여행이 떠올랐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던 내 모습이 보였다. 후배는 모든 정보를 배워야 하는 텍스트로 받아들여서 매일 ‘열심히 공부한다’는 표현을 썼다. 정보를 정복할 대상으로 보아서인지 정복은 요원했고, 출발일이 다가오자 불안에 잠식당해 밤잠을 못 이룰 정도라고 했다.
그는 짐 꾸리기부터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 대수롭지 않은 정보를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중요한 정보를 흘려보냈다. 여행 중에 자신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데 서툰 사람인 걸 깨달았고, 애증 관계에 있는 가족의 소중함을 새록새록 느꼈다. 자신에게는 휴양형 여행이 맞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동이 많은 여정을 계획한 것에 후회와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는 자신의 시선이 빠진 채 다른 사람이 했던 대로 따라간 여행이었던 탓이었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정보를 좇아 여행 준비를 한 사실을 너무 늦게 발견했다. 여행을 준비할 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였다.
여행 정보를 선택해서 여행을 꾸리는 방식에는 여행자의 가치관과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비슷비슷한 패키지여행 말고 다른 여행 방식을 꿈꾼 적이 있는가? 내가 가고 싶은 곳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보고, 느끼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은 없는가? 처음이라 나만의 방식이 무엇인지 모르겠는가? 조직 구성원으로 무채색이 되어 살아가는 직딩, 출퇴근의 경계도 불분명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무한 반복인 그대여, 여행 준비 열차인 책에 몸과 마음을 실어보자.
이 책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을 위한 여행안내서이다. 혼자 떠나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나서 망설이는 이들을 위한 마음 준비서이다. 시작이 어렵지 혼자 한 번만 떠나보면 일상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이 그리워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여행에 친구나 가족이 따라가겠다고 하면 골칫거리로 생각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이 책이 첫 자유여행의 방향을 잡는 데 길잡이가 되길 바라며, ‘조용한 혁명’ 같은 여행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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