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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파리, 프랑스

여행 가려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먼저 경제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를 떠올릴 것이다. 바빠서, 돈이 없어서 떠나기를 주저한 적 있는가? 여유가 생기면, 이 일만 끝나면, 아이들이 크면 등의 이유로 여행을 유예한 적이 있는가? 지금 처지에 여행은 사치라고 생각한 적 있는가? 다 맞는 말이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먹고 살기 바쁜데(현대인은 다 바쁘다), 그 돈이면 신상 냉장고로 바꿀 수 있는데(구식 냉장고도 잘 작동하면 더 써도 된다), 아이들 다 키워놓으면 떠나야지(애들 다 크면 체력도 방전된다) 등등. 


여유는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있고,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 여유란 넉넉해서 남는 상태인데, ‘넉넉함’은 객관적 숫자가 아니라 심리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넉넉한데, 어떤 사람은 왜 그렇지 못할까? 여행의 필요충분조건은 넉넉함을 일부러 만들려는 절실한 마음이다. 일상과 거리를 두려는 의지는 시간을 내고 비용을 마련하게 만든다. 나에게는 타고난 백수 기질이 있다. 일이 바쁘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보려고 일만 하면서 사나, 하는 회의가 밀려온다. 타고난 백수 기질이 발현될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마다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고, 이 순간을 헤쳐 가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르다. 내 경우에는 고맙게도 여행이 하나의 해결책이다. 


계속 달리면 가속이 붙어서 멈추고 싶어도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비나 눈이 올 때 감속을 해야 하는 이유를 기억하는가? 최고 속도로 달리는 차는 제동거리가 길어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미끄러진다. 달리던 차는 적절한 지점에 서지 못하고 사고로 이어지기 쉽다. 여행은 쉼표이자 갑자기 멈춰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한 감속장치이다. 여행이 모두의 쉼표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는 쉼표일 것이다. 


학생에게는 일 년에 방학이 두 번 있다. 방학은 공부의 과부하를 진정시키는 시간이고, 교우관계를 정돈하는 시간이다. 학기 중에 매일 만났던 같은 반 친구들 모두와 친하진 않다. 친한 친구도 있고 매일 얼굴만 보는 사이도 있다. 방학 동안 친한 친구를 못 만나면 그립다. 꼴 보기 싫은 친구는 방학 동안 안 만나서 좋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되면 껄끄러운 친구와 다른 반이 되어 안도하고, 친한 친구와 헤어져 아쉽다. 학교에서 방학은 공부를 위한 휴지기가 아니라 사실은 교우관계 휴지기였다. 


어른이 되면 학생 때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학창 시절에 정말 공부가 가장 중요했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학교 다닐 때 힘들었던 이유는 공부가 아니라 친구 관계일 때가 더 많았다. 학교 졸업 후에 남는 건 지식이 아니라 친구이다. 학교생활은 학생의 사회생활이다. 사회생활에서 힘든 건 일이 아니다. 학생에게 공부, 직장생활에서 일, 가정생활에서 가사와 양육은 공식적 일이다. 사회생활에서 답답한 건 사람과의 관계를 조절하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방학이 있어서 인간관계도 거리 두기를 했다. 직장에서는 세계관이 다른 상사, 동료, 선후배와 거리 두기가 불가능하다. 혼자 일하지 않는 한(사실 완전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일에는 인간관계도 포함되는 탓이다. 가정에서는 생활공간조차 한정되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거리 두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어른이 되면 관계를 돌아보고 정돈할 시간이 학생 때보다 더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 어른에게는 방학이 없다. 과거와 근무환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 대부분 직장인에게 휴가는 일주일 남짓이다. 매년 이 휴가를 빼면 은퇴할 때까지 대부분 출퇴근의 무한 반복이다. 가정을 이루면 출퇴근 반복에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더해진다. 주변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할 물리적, 심리적 시간이 없다. 사무실에는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사람들이 넘친다. 사람이 싫으면 일은 몇 배로 힘들다. 언젠가 떠나겠다는 욕구가 팽창해서 폭발 직전에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넉넉함을 허락하길 망설인다. 폭발하지 않으려고 팽팽한 긴장 상태가 이어진다. 일은 매뉴얼이 있어서 기계적으로 할 수 있지만, 마음 매뉴얼은 없다. 뾰족한 마음이 주변 사람에게 들키고 문제가 되어 지친 적은 없는가? 


외국에는 갭이어(gap year)가 있다. 갭이어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 전이나 사회로 나가기 직전이다. 이 시기에 세상을 경험하러 주로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간다. 어른으로 살기 전 마지막 방학 같은 것이다. 이 시간이 낭비일까? 우리는 이미 정해진 생애주기, 졸업, 취직, 승진, 결혼, 출산, 육아로 달려간다. 취직해도 갑작스러운 실직에 대비해서 자기계발을 하는 ‘N잡러’가 되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잠시 멈추면 뒤처질까 봐 불안하다. 뒤처진다는 게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기준에 따라 인생의 속도를 결정하면 숨이 찰 수밖에 없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는 일부러 만들지 않는 한 영원히 없다. ‘퇴사하고 여행 가기’, 퇴사하거나 아이들 방학에 ‘한 달 살기’를 하는 이유이다. 백수라면 시간이 많아도 경제적 여유가 없다.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런 논리로 인생이 전개된다. 여유는 뫼비우스 띠처럼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안 잡혀서 여행은 사치가 된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기 전에 눈 질끈 감고 환불 불가능한 항공권을 질러볼 것을 권한다. 환불 불가능한 항공권은 주로 할인 항공권이다. 할인 항공권은 취소하면 환불받지 못해서 고스란히 날리게 된다. 예약했다 취소 버튼을 누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몇십만 원이 그냥 없어진다면 아깝다. ‘본전’ 생각에 예약한 항공권에 맞춰 시간 낼 궁리를 하게 된다. 상황이 발목을 붙잡을 때 내가 주로 쓰는 방법이다. 본전 카드는 지금까지 꽤 유용했다. 


환불이 불가능하거나 취소 수수료가 왕창 붙는 항공권을 지르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배달앱에서 메뉴를 선택하고 결제한 후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먼저 출발하고 싶은 날짜와 가격이 적절한 항공권을 열심히 찾는다. 항공권 발권을 위한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결제창이 뜨면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3초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결제창에 있는 결제 완료를 누르면 된다. 시간도 별로 안 걸린다. 항공권 발권 후에도 세상은 잘만 돌아간다. 


결제 완료 버튼을 누른 후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다.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마음이 요동치곤 한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결정을 곱씹는 건 정신건강에 나쁘다고 최면을 건다. 이때 필요한 건 떠날 이유를 합리화하는 기술이다. 비행기에 탈 날을 기다리면서 탈탈 털린 멘탈을 일으켜 세운다. 바닥에 누워있던 심신에 연료를 공급한다. 무한 반복해야 하는 일이 항공권 하나로 ‘유한한’ 반복으로 바뀐다. 떠나기 전날까지만 버티면 된다. 고통도 유통기한이 있으면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우리는 이 상태를 희망이라고 부른다. 자신에게 희망을 주고 관대함을 베푸는 것이 사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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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0-19 16:4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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