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마카오 (저 아닙니다)
해외여행을 하는 데 언어 실력은 어느 정도 필요할까?
혼자 또는 자유여행을 망설이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언어이다. 여행할 나라의 언어를 말할 수 있으면 여행의 질이 달라진다. 현지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경험의 결이 다채롭고, 경험의 폭도 풍성해진다. 그렇더라도 그 나라 언어를 모른다 해서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다. 언어는 자유여행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여행 전체를 지배하진 않는다. 언어를 몰라서 잃어버렸던 아이 같은 순진한 호기심이 부활할 수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자발적 문맹자’가 되길 두려워하지 말자.
글을 읽을 줄 몰라서 마트에 가면 한 시간이 금방 흐른다. 과자 하나 사는 데 내용물이 무엇인지 몰라 포장을 이리저리 돌려 본다. 포장지만 보고 어떤 맛인지 추측하며 죽어있던 상상력을 동원한다. 해독할 수 없는 글자와 그림으로 된 포장지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 겨우 과자 하나 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피곤할 수 있겠지만, 평소에 죽어있던 호기심이 왕성해진다. 언어를 몰라 익숙해서 무심코 흘려보냈던 일상적 물건조차 신비로운 것이 된다.
일상 용품은 그 나라의 ‘찐’ 문화이다. 우리의 일상은 창덕궁에 있는 게 아니라 집에, 직장에, 마트에 있다. 일상이 따분한 이유는 지나치게 익숙해서이다. 익숙해지면 당연해서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 질문이 없으면 자극도 없고, 흥분도 없다. 마트에서 맥주를 살 수 없다고 상상한 적 있나? 이슬람 문화권 나라에 가면 일반 마트에서 술을 살 수 없다. 술판매 허가를 받은 마트나 리쿼숍에서만 술을 팔기 때문이다. 뉴욕에서는 다른 이유로 술을 사기 힘들다. 뉴욕에서는 총기 소지가 가능한 대신 술 판매가 통제된다. 영화 보면 어디서나 자유롭게 맥주를 마시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술 판매 허가를 받은 마트에서만 술을 살 수 있고, 바에서만 마실 수 있다. 유럽에서는 맥도날드에서도 맥주를 마실 수 있다. 한국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술을 사고 마실 수 있어서 이슬람 국가와 뉴욕에서 놀랐다. 이렇게 여행은 당연한 일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시간이다. ‘자발적 문맹’은 여행자의 특권이다.
여행하는 모든 나라의 언어를 아는 것이 실제로 가능할까?
영어와 제2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 모국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다. 우리가 언어장벽이라고 말하면 대체로 영어를 말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한다. 간단한 여행 영어만 알아도 언어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사라진다. 영어가 세계 공통어지만 만능어는 결코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나라에서 영어가 전혀 안 통한다. 영어가 거의 안 통하는 나라 중에 가까운 중국이 있다. 중국어를 몰라서 중국에 못 가나? 천만에.
나도, 친구들도 한자라고는 이름 석 자밖에 모르지만, 베이징에 재미있게 다녀왔다. 하루는 베이징에서 차로 2시간 걸리는 민속마을인 고북수진에 갔다. 우리로 치면 용인 민속촌 같은 곳이다. 고북수진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지나있었다.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식당이 어디 있는지 몰라 먼저 골목 구경을 했다. 이리저리 걷다가 골목 한 귀퉁이에서 작은 식당을 만났다. 친구들과 나는 모두 한자에 까막눈이었다. 식당 주메뉴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들어가서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뭐라도 먹을 수 있겠지, 하면서.
나는 밥 덕후이다. 어떤 음식을 시켜도 기승전 ‘밥심’을 예찬하는 터라 밥이 있어야 했다. 종이와 펜을 꺼내 밥 그림을 그렸다. 밥알을 한 알 한 알 정성스럽게 쌓아 밥그릇 위로 수북이 올라오게 그렸다. 그 옆에 한자로 밥 미(米)를 써서 식당 주인에게 보여주었다. 꽤 신박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흐뭇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식당 아주머니는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아마도) 식당에서 파는 메뉴를 계속 중국어로 말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우리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잠시 사라지더니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 우리는 이제 3:2가 되었다. 머릿수가 늘어난 만큼 답답함도 커졌다. 작은 식당은 주문하려는 이와 주문받으려는 이의 대결장이 되었다. 다섯 사람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짓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대환장 파티였다.
아주머니가 잠시 뒤로 주춤하더니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를 데려간 곳은 주방이었다. 불 위에 올려진 커다랗고 움푹한 냄비를 가리켰다. 고개를 쑥 빼서 냄비 안을 들여다보니 국수가 들어있었다. 국수라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제야 아주머니가 계속했던 말이 아마도 ‘미엔’이었던 것 같고, 면이 아닐까 추측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던 ‘미엔’을 큰 소리로 반복하면서 손가락 세 개를 힘주어 폈다. 아주머니는 웃었고 마침내 우리는 테이블로 와서 앉았다. 험난하고 역동적인 점심 주문 과정을 끝내고 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우리는 개선장군이었다. 의기양양하게 자리에 앉아서 승리(?)의 무용담을 나누며 깔깔거렸다.
한자 문화권에 가면 한자를 전혀 몰라서 음식을 주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벌이곤 한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음식을 시켰는지, 옆 테이블을 염탐한다. 언어를 모르면 식당에서 주문하는 일이 넘어야 할 큰 산일 때가 있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현지인과 직접 대면하는 소동은 추억이 되곤 한다. 식당 주인은 언어가 안 통해서 문전박대를 하기는커녕 언어를 몰라 쩔쩔매는 여행자를 걱정한다. 현지어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정도만 말해도 식당 사장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 있다. “맛있어요”란 고급 어휘를 익히면 특급 대접을 받을 것이다.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이 김밥천국에 갔다고 가정해 보자. 김밥천국 사장님은 외국인과 말이 안 통해서 내쫓기보다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외국인이 주문하려는 음식을 알아내려고 할 것이다. 어디나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 식당 사장님은 밥 먹으러 온 손님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람에 대한 기본적 믿음을 가지면, 언어를 모르는 건 부차적 문제다. 외국이라면 그 나라 언어를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당당해지면 좋겠다.
그래도 자유여행을 계획했다면, 틈틈이 간단한 여행 영어 표현을 익혀두면 좋다. 영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하면, 자신감이 올라간다. 우리는 언어에 대해 지나친 완벽을 추구한다. 외국인은 한 언어의 기본 알파벳만 배웠어도 그 언어를 안다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는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말할 수 없으면, 그 언어를 못 한다고 말한다. 이는 언어에 대한 의식 차이다. 여행 영어에서 고급 어휘가 필요하진 않다. 우리는 영어로 말할 때,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은 완벽한 문장으로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이 쓸데없는 강박을 버리면 의사소통은 쉬워진다. 기본적인 단어만 알아도 여행하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
여행할 때 말하기보다 듣기가 더 필요하다. 우리가 하는 질문은 대체로 간단한 편이다. “얼마예요?” “여기 어떻게 가요?” 등등. 여행자는 주로 돈을 쓰는 사람이고, 현지인은 돈을 벌려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한 단어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질문 후 다음 차례는 상대의 대답이다. 상대의 대답을 못 알아들으면 질문은 쓸모없다. 상대의 말을 대충 알아들으면 된다. 못 알아듣겠으면 천천히 말해달라고 하거나 종이에 써 달라고 하면 된다. 언어를 몰라 답답할 수 있겠지만, 영어에 대한 공포심을 벗어버리면 언어 때문에 여행을 못 하는 일은 없다.
영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어렵다면 영어를 사용하는 영화 한 편을 정해서 하루에 10분씩만 반복해서 듣고 문장을 통째로 외워보자. 많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절대 욕심내지 말자. 외웠는데 잊어버려도 괜찮다. 문장을 암기한 후 잊어버리는 일은 아침을 먹어도 점심시간이 되면 배고픈 것처럼 당연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모두 그렇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활활 타오르는 불같은 열정을 장전하고 하루에 두 시간씩 일주일 하다가 그만두는 것보다 곧 꺼질 불꽃처럼 시들시들하더라도 오래 하는 게 장땡이다. 매일 10분, 한 달 정도 암기하고 까먹기를 반복하면 안 들렸던 말이 조금씩 들리는 신세계를 경험할 것이다. 무언가를 한 달 동안 꾸준히 하는 건 생각보다 무척 어렵다. 한 달을 채우면 찾아오는 변화를 경험해 보기 바란다.
의사소통은 언어만이 아니라 비언어적 요소도 중요하다. 손짓, 몸짓, 표정 등 궁하면 통한다. 의사소통은 원하는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지 문장을 오류 하나 없이 말하는 게 아니다. 한 언어에 대해 유창한 것은 내 의사를 전달하고 상대의 의사를 이해하는 것이지, 꼭 문법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어 원어민으로 한국어에 능통하다. 하지만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조직에서도 서로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한 경험이 있다. 언어를 잘 구사하는 것과 의사소통을 잘하는 것은 별개다. 영어 못한다고 위축될 필요도 없다. 모국어가 아닌데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이 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못 알아들으면 당당하게 다시 묻고,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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