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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파리, 프랑스  

마음 준비가 가치 지향적이라면 예산 세우기는 현실 지향적이다. 현실에서 생계가 발목을 붙잡지 않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 여행은 로망이 아닐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여행은 그 매력을 상실할지도 모른다. 120개국을 여행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2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고, 은퇴 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일 년 중 6개월 이상 여행하면서 외국에서 보낸다. 여행이 삶 자체라면 어떨까? 그를 부러워하는 마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뜻밖의 말을 들었다. 


“뭐가 부러워. 내가 가장 부러운 사람은 처음 여행하는 사람이야. 모든 게 다 처음이니 얼마나 흥분되고 재미있겠어.” 


처음은 실수투성이지만 흥분 지수는 최고치이다. 자유여행을 떠날 그대여,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아는가?


혼자 여행은 일단 혼자 할 수 있는 자신감도 있어야 하고, 가용 예산 범위에도 맞아야 한다. 예산을 세운 후 여행해도 변수가 많아서 예산 초과는 빈번하다. ‘충동구매 비용’과 예상치 못한 헤매기로 지출하게 되는 ‘멍청 비용’이 대표적인 예산 초과 비용이다. 


충동구매는 두 가지 얼굴이다. 충동구매 물건은 예상치 못한 득템으로 거듭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여행지에서 홀림의 포로가 되어 치른 대가이다. 모로코의 페즈에 갔을 때다. 모로코 특산물은 양탄자와 은(도금)세공품이다. 은세공품 가게에 들어서자 엘사 공주가 사는 궁전에 초대받은 것 같았다. 처음 보는 화려한 문양의 은제품은 조명을 받아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오라를 발산했다. 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고, 눈이 멀었다. 마법의 공간에서 충동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꽤 고가의 은도금 찻주전자를 보고 홀린 듯이 지갑을 열었다. 집에 오니 마법이 풀렸다. 동화 속 보물 같았던 주전자는 뭔가 어색했다. 한 번도 쓰지 않고, 바로 주방 수납장 행이었다. 그렇게 오 년 동안 깊숙하게 넣어두고 까마득하게 잊었다. 어느 날 정리하다 까맣게 색이 변해 있는 주전자를 발견했다. 화려한 과거는 찾아볼 수 없는. 그냥 버릴 물건이었다.  


이렇게 물건이 나에게만 윙크하며 손짓할 때가 있다. 그러면 마법에 걸리고 만다. ‘어머, 저건 꼭 사야 해’ 주문에 걸린다. 쇼핑백을 받아 들고 그 물건을 만나기 위해 여행하고 있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어깨가 으쓱거리고 입이 귀에 걸려 보람찬 하루를 보낸 내가 자랑스럽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보면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를 되뇌며 서랍 어딘가에 처박아 놓곤 한다. 


충동구매로 쌓아놓은 물건을 떠올려 보자. 본전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한 채 먼지가 뽀얗게 쌓여가는 물건이 있을 것이다. 이 증거는 한순간 홀려서 잃어버린 자제력이다. 


‘멍청 비용’은 충동구매 비용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충동구매 비용은 자발적 지출이고, 줄일 수 있는 지출이다. ‘멍청 비용’은 강제 지출이고, 충동구매와 달리 의미 있는 학습비용이다. 체코를 여행할 때였다. 프라하에서 체스키크룸로프란 도시를 가기 위해 버스표를 예약했다. 버스 터미널은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고, 여유 있게 도착했다. 버스표에 적힌 플랫폼으로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플랫폼 전광판에는 10시 버스 출발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쎄-했다. 안내데스크에 가서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었다. 


“곧 떠날 시간인데 버스가 없어요.”


“이 표는 여기서 출발하는 표가 아니에요. 다른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표예요.”


다른 곳이라니? 버스 출발 시간은 9시였고, 시계를 보니 8시 45분이었다. 


그는 지하철 지도를 꺼내서 가는 법을 친절하게 설명했고, 20분쯤 걸린다고 말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느긋한 직원이 얄미웠다. 택시를 타면 9시 전에 도착할 수 있는지 물었고, 희망적인 대답을 들었다. 버스 터미널 밖으로 나가 택시 승차장으로 달렸다. 운전기사에게 체코어로 쓰인 터미널 역명을 보여주며 버스 출발 시간을 말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시계를 봤다. 다급한 내 의사가 전달된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택시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일요일 아침, 도로는 한산했지만 차가 정지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시계를 보았다. 버스 터미널이 어디쯤 있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어서 더 조바심이 났다. 과연 버스를 탈 수 있을까? 여기는 어디고, 나는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멍청함을 자책하며 방황하는데 차가 멈췄다. 운전기사가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오, 여기가 터미널? 운전기사의 적극적 협력(?) 덕분에 해피엔딩이었다. 


내 삽질로 계획에 없던 택시비를 지출했지만, 프라하의 버스 터미널은 두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플로렌스 터미널과 안델 터미널. 여행자들은 플로렌스 터미널을 많이 이용해서 다른 터미널이 있는 걸 상상도 못 했다. 당연한 건 없는데 말이다. 예매할 때 버스표를 꼼꼼하게 안 보고, 출발지를 내가 알고 있는 곳으로 생각한 게 실수였다.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생각한 대로 믿는다. 여행할 때마다 멍청 비용을 치른 후 속단해서 생각하지 말 것을 배운다. 


“하루 예산은 얼마면 충분할까요?”

“총비용은 얼마나 들었어요?”     


인터넷 여행 커뮤니티에 빈번하게 올라오는 질문이면서 주변 지인들에게서 많이 받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은 없다. 충분한 예산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5성급 호텔에서 자고, 미슐랭 가이드에 나온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일정이면, 하루 예산이 그렇지 않은 여행자의 전체 여행비용과 맞먹을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의 공동 침실인 도미토리에서 자고, 식사는 현지 마트를 이용한다면 해외여행일지라도 국내여행 경비보다 더 적게 들 수 있다. 5성급 호텔과 고급 식당을 이용하는 여행만이 좋은 여행이고, 게스트하우스에서 자고 마트 먹거리로 식사를 하는 여행이 나쁜 여행도 아니다. 


사람마다 여행 스타일이 다르고 여행에서 얻는 즐거움이 다르다. 자신의 기호에 따라 예산을 편성할 수 있는 것도 자유여행의 매력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면서 한두 번쯤 고급 식당을 이용할 수도 있고, 마트에서 산 식재료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고급 호텔에서 하루쯤 잘 수도 있다. 마트는 생필품의 거대한 집합소이다. 마트에 가면 그 나라의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다. 필요한 게 없어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고, 현지의 생생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게스트하우스만의 매력이 있다. 숙소의 특성상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다. 한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그러면서 다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접한다. 이 시간은 딱딱하게 굳어있던 사고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이런 자극은 여행을 유연하고, 생생하게 이끈다. 5성급 호텔은 뽀송뽀송한 침구와 묵직한 가구, 소음을 다 삼키는 두꺼운 카펫으로 꾸며져 문을 닫으면 외부세계와 차단되어 나만의 세계로 들어간다. 아쉬운 점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다. 근사한 호텔 바에서 멋진 ‘본부장’을 만나는 건 한여름에 함박눈이 올 확률과 비슷하다. 숙소마다 특징이 있으니 원하는 여행 방식을 고려한 후 숙소를 선택하는 게 정답이다. 


다만 무조건 절약만 하는 여행은 피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행이 고유한 경험이 되려면 ‘체험’에 투자할 것을 추천한다. 각종 입장료와 액티비티에 드는 비용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신의 욕구와 취향에 따라 비용을 분배하자. 내 경우에는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서 박물관과 미술관 입장료 등에 넉넉하게 예산을 잡는다. 반면에 식사비용에 상대적으로 예산을 적게 배정하는 편이다. 여행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은 평소에 하지 않았던 여러 가지 체험을 통해서이다. 이렇게 얻게 되는 시야 확장은 여행의 참맛이다. 


예산 때문에, 시간 때문에, 여행을 계속 미룬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예산이 적다면, 아시아의 가까운 도시가 여러 가지 면에서 좋다. 일단 짧은 여행도 가능해서 심리적 부담도, 경비 부담도 적다. 예산이 적다면 가깝고 덜 번잡한 대만의 타이베이, 홍콩 등 안전한 도시에서 첫 자유여행을 시작하면 어떨까? 패키지로 갔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여행 패턴과 스타일도 반복된 학습에서 생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출발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여행을 준비하면서는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선택할 근육이 생긴다. 여행 근육이 야금야금 붙으면 그다음부터 떠나기 쉬워진다. 자유여행을 해 본 적 있는 사람이 계속 자유여행을 하는 이유이다.      


인생은 개인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개입된 선택의 합집합이다. 인생의 변곡점에서 누군가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처럼 보여도 여러 선택지에서 하나를 뽑은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내밀한 욕구가 스며있다. 모든 선택이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욕구불만이 생기기 마련이다. 여행지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집약적 선택’ 상황에 놓인다.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을지, 기본적 욕구 충족을 위한 선택뿐 아니라 미술관에 들어갈지 말지, 지적 욕구 충족을 위한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여행은 짧은 시간 동안 무수한 선택을 연습하는 장이다.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거치고, 이 선택은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선택할 때가 많다. 


여행지에서는 선택의 순간을 집중적으로 겪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 눈에 드러난다.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선택 횟수가 쌓이면 자신의 욕구를 알게 된다. 잠재되어 있던 욕구도 끌어낼 수도 있다. 사소한 욕구 충족이 안겨주는 기쁨을 맛보기 시작할 것이다. 욕구 좌절도 물론 빈번하게 일어난다. 욕구 좌절은 타협을 배울 기회이다. 계획이 틀어져도 적정 수준에서 받아들이는 융통성을 배운다. 지나친 욕구와 타협하고 대안을 수용하며 얻게 되는 융통성이야말로 자유여행이 주는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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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1-03 18: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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