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금
[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베를린, 독일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하나지만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시간이 없어서, 일 때문에, 가족 때문에, 집이 아니면 밤에 잠을 못 자서, 혼자 밥을 못 먹어서 등등. 사소해 보여도 개인에게는 뒷목 잡을 이유이다. 비혼은 떠나기 비교적 덜 어렵다. 혼자 몸이라 직장에서 휴가 일정만 잘 조율하면 된다. 기혼 여성의 고민은 복잡하다. 남편과 아이가 끼니를 제때 못 챙겨 먹을까 봐, 집안 꼴이 엉망이 될까 봐 걱정한다. 며칠 먹을 반찬을 한꺼번에 다 해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이불 빨래, 대청소 등 식구들 불편할까 봐 이것저것 챙기느라 출발하기도 전에 에너지를 몽땅 소진한다. 이 시간이 싫어서 여행 안 간다는 사람도 많다.
기혼 남성은 끼니 걱정, 집 걱정 안 하는데, 왜 여자만 늘 걱정하는가? 밥은 여자만 해야 하나? 집을 비우면 애들보다 남편이 걱정이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밥은 집에서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자. 집 밖에 나가면 눈에 보이는 게 식당이다. 마트에는 데우기만 하면 되는 즉석 반찬도 많다. 동네마다 엄마 손맛을 자랑하는 반찬가게도 있다. 게다가 한국은 배달 강국이다. 스마트폰에 배달앱만 설치하면 주문 안 되는 게 없다. 먹거리로 넘치는 시대에 왜 끼니 걱정을 하는가? 설령 한두 끼 걸러도 건강에 해가 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문제는 너무 높은 칼로리이지 굶어서 문제가 아니다. 살림꾼은 하루만 집을 비워도 집이 엉망이 된다고 한다. 집이 좀 엉망이면 어떤가? 분양 대박을 노리는 모델 하우스처럼 집을 정돈해야 마음이 안정된다면, 과연 누구를 위해서인지 생각해 보자. 식구를 위한 것인지, 자신이 못 참기 때문인지? 일주일쯤 청소 안 해도 집안 꼴은 그대로다.
식구들은 하루 이틀은 아내의 부재, 엄마의 부재를 ‘불편’해할 것이다.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명심하자.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챙겨줄 아내가, 엄마가 없어도 식구들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산다. 며칠 집을 비우고 걱정에 싸여 집에 돌아오면 식구들이 아내의, 엄마의 빈자리는커녕 왜 벌써 왔는지 물어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아내의, 엄마의 고정된 자리는 없다. 아내의, 엄마의 고정된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아내도, 엄마도 일 년에 한 번 3박 4일 정도 혼자 또는 친구와 여행 가겠다고 선언하자. 끼니는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해 보자. 식구들은 처음에는 저항하겠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잘 적응할 것이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여행을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다. 시대가 변했어도 가족 중심주의는 여전하다. 가족은 하나가 아니라 개성이 다른 개인이 모인 공동체이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도 성격이 다르다. 결혼제도로 묶인 부부는 당연히 다른 사람이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이심이체’이다. 가족은 개성이 다른 구성원이 모여 불협화음을 내기도 하고, 화음을 내기도 한다. 가족이 모든 것을 같이 해야 화목한 것이 아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서로 다른 사람이 모인 공동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각자 보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함께 있지만 필요하면 따로’라는 의식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어리다면 아이를 두고 여행을 계획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힘들다. 하지만 아이가 십 대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십 대 아이들에게 365일 동안 부모가 밀착해서 살펴도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아이와 심리적 거리 두기를 해 본 적이 없는 부모, 특히 엄마는 물리적으로 아이와 거리 두기를 두려워한다. 엄마라는 정체성은 가족과 떨어져 여행하는 데 걸림돌이다. 결혼 후 엄마로만 살면서 여행이라고는 가족 여행이 전부인가?
가족 여행은 식구들과 관계가 돈독해지는 시간이지만 ‘나’를 소멸시키는 여행이다. 엄마는 가족을 챙기고 배려하느라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다. 엄마에게 여행은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의 연속이다. 가족 여행은 ‘찐’ 여행이 아니다. 심지어 여행(실은 가족 여행)을 싫어한다는 말을 하기에 이른다. 가족이 전부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애들 다 크면 그때 나를 위한 여행을 갈 거야.”
‘찐’ 여행을 계속 미룬다. 그 안에서 보낸 시간이 길수록 울타리를 나갈 기회가 생겨도 겁부터 난다. 이런 경우 가족 곁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자. 자신의 모습을 부정해서 속이는 대신, 받아들이고 대안을 모색하자. 일단 가족과 함께 떠나서 앞에서 말했듯이, ‘따로 또 같이’ 콘셉트로 여행을 계획해 보자.
가족 여행을 갔다가 서로 의견이 달라서 다툰 적이 있는가? 별것 아닌 일로 싸워서 여행을 망친 기억이 있는가? 왜 다퉜는지 기억하는가? 구체적 이유는 기억도 안 난다고 말하겠지만 이유는 단 하나이다. 개성이 다른 사람이 며칠씩 같이 보내기 때문이다. 여행 가면 눈 떴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같이 시간을 보낸다. 사람은 변덕스러워서 계속 혼자 있어도 힘들고, 다른 사람이랑 계속 같이 있어도 힘들다. 문제점을 알면 해결책도 찾을 수 있다. 혼자서도 시간을 보내고, 함께도 시간을 보내자. 정말 간단하다. 일단 하루나 반나절 동안 가족과 헤어지는 연습을 하면 된다.
아침에 호텔에서 나가 각자 원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자. 짧은 시간이지만 헤어지는 기분과 만나는 기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저녁에 호텔에서 만나도 좋고, 점심 식사 약속을 하고 적당한 곳에서 만나도 좋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점심 약속이라니, 흥분되지 않나? 반나절만 따로 보내도 항상 곁에 있어서 소중한 줄 몰랐던 사람이 새롭게 보인다. 잠깐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스쳤던 여행자를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도 반가운데, 가족을 다시 만나면 상상보다 훨씬 반갑다.
요즘 어디에서나 와이파이가 잘 되어 카카오톡과 카카오 보이스로 통화도 할 수 있어서 못 만날 일은 없다. 연락이 안 될 경우, 전혀 다른 방향에 있어서 만나기 애매한 경우, 저녁에 호텔에서 만나면 된다. 길치라고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요? 택시를 잡아타고 머무는 호텔 명함을 운전기사에게 내밀면 된다. 말 한마디 안 해도 택시 기사가 알아서 호텔 앞에 데려다준다. 길 잃을 걱정은 넣어두자. 쓸데없는 걱정은 넣어두고 택시 타는 것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지, 하는 배짱을 챙기자.
혼자 몇 시간 보내는 것만으로도 가족 여행이 갑자기 ‘내 여행’으로 바뀔 수 있다. 유명 관광지에 힘들게 찾아갈 필요도 없다. 일행, 즉 가족과의 관계 그물에서 잠시 벗어나 숙소 근처를 혼자 천천히 걷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나 식당을 발견하면 들어가 보자. 혼자 주문도 해 보고, 밥도 먹어보자. 자유여행의 첫걸음은 혼자 밥 먹고, 걷고, 차 마시는, 여유를 누리는 것이다. 헤어진 가족이 붙박이 옷장처럼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온전히 혼자인 느낌은 안 나겠지만, 은근한 해방감을 맛보기에 충분하다.
혼자 있으니 심심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혼자 밥 먹으니 맛도 없고, 배도 안 고프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난 적 있다. 아무것도 안 먹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가족과 떨어진 것을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이럴 경우, 그냥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자. 혼자보다 가족 울타리에서 더 안정감을 느끼고, 재미를 찾는 성향인 걸 찾아내도 의미 있다. ‘저기’가 아닌 ‘여기’에 집중할 테니까. 모든 사람이 혼자 여행을 꿈꾸지는 않는다. 직접 해 보고 단념하는 것과 안 해 보고 포기하는 것은 다르다.
이 책을 들춰본 사람은 적어도 가정을 이루기 전에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자신의 독립적 성향을 잊고 살았을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가족과 잠시 헤어지면 잊고 있던 ‘자유의 맛’을 금방 기억해낼 것이다. 가족 생각은 하나도 안 나고 시간이 빛의 속도로 흘러서 아쉬워할 것이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가족 여행에서 ‘내 시간’을 궁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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