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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sychology Times=김남금 ]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는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사자와 ‘아무 문제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찾아 길을 떠난다. 자신에게 없는 뇌, 심장, 용기를 가지면 행복할 거라고 믿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줄 마법사를 찾아 노란 벽돌길을 따라 여행한다.


여행하는 동안 ‘많은 문제’에 맞닥뜨리고 지혜와 용기를 모아 상황을 헤쳐 나간 후 마침내 마법사 오즈를 만난다. 마법사는 허수아비에게 학위 증명서를 주고 양철 나무꾼에게는 심장 모양의 시계를, 사자에게는 용기라고 적힌 훈장을 준다. 이들은 선물을 받고 바라는 대로 변했다고 기뻐하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을 뿐이다. 도로시는 말한다. 


“언젠가 다시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게 되더라도 우리 집 뒤뜰보다 멀리 가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건 멀리 있는 게 아니거든. 잃어버린 적도 없이, 항상 나와 함께 있었어!”


감정과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면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여행은, 나에게 노란 벽돌길이었다.     


 

나는 돌아오려고 떠나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이 사실을 인정했던 건 아니다. 떠나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겼던 시간을 온몸으로 겪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의 무게에 치여 일요일에는 시체처럼 잠에 빠졌다가 월요일에 깨어나곤 했다. 다른 생각은 눈곱만큼도 할 수 없었다. 서른 살에 ‘이렇게 인생을 마감할 순 없어’를 외치고 다니던 직장에서 호기롭게 나왔다.


손에는 파리행 ‘편도 항공권’을 쥐고 있었다. 편도 항공권에 내 결심을 싣고 1년 치 생활비를 챙겨 떠났다. 앞에 펼쳐질 시간을 고민하지 않아서 생겼던 용기였다. 하지만 용기를 위장한 객기는 아니었을까?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 의지를 읽은 것은 대사관뿐이었다. 편도 항공권은 잠재적 불법체류자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서 입국 준비서류가 까다로웠지만, 어쨌든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 4개월 동안 프랑스 중부 지방 투르 어학원에 다녔다. 어학원에서 만난 한국인 대부분이 유학생으로 장기체류 예정자였지만, 모두 왕복 항공권을 가지고 있었다. 굳은 결심과 달리 편도 항공권 외에는 준비한 게 없던 터라 외국인에게 중요한 현지 신분증인 거주 체류증 받는 일도 순탄치 않았고, 파리로 이사할 집 구하기 등 두 발로 뛰어다녀야 할 일이 생겼다. 여행자에게 이상적으로 보였던 도시가 장기 체류자가 되어 보자 거품이이었다. 고풍스러운 건물에 사는 주인공이 되었던 흥분이 빠르게 물러갔다. 그 자리에 의문이 차올랐다.


'다른 미래'는 내가 만들어낸 신기루였다. 신기루가 사라진 자리에 현실이 남았다. 여러 가지 행정 절차에 허둥댔고,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불친절함에 위축되었다. 출발 때 장전한 호기로움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렸다. 내 안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귀소본능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


결국 어학원 동기 중 나는 가장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떠날 궁리를 하는 만큼 돌아올 궁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 번은 몸과 정신 사이에 시차가 생긴 적이 있다. 모로코 여행 후 카사블랑카 공항에서였다. 탑승 시간이 다가오는데 게이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두 자신이 갈 곳을 아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가지 못할까 봐 안달복달하는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쎄한 기분이 들어서 공항 안내데스크로 갔다. 내가 탈 비행기가 연착된 것은 물론이고 탑승구도 바뀐 걸, 직원에게서 들었다. 두 주 동안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얻은 교훈은 정각에 출발하지 않는 버스나 기차 때문에 목덜미를 잡지 않는 것이다. 공항에서도 교훈을 되새김질하게 될 줄은 몰랐다. 비행기가 연착하고, 탑승구가 바뀌어도 안내 방송 없이 공항은 잘만 굴러갔다.


긴 비행 후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캐리어를 기다렸다. 짐을 찾은 사람들은 서둘러 사라졌다. 빈 컨베이어벨트가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더니 짐을 기다리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캐리어 분실 신고를 마치고, 여권, 지갑, 카메라만 든 크로스백만 메고 공항버스에 탔다. 여행이 끝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집에 도착해서 고향의 맛, 매콤한 신라면을 끓여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났다. 잃어버린 캐리어 탓인지 허전했다. 캐리어 안에는 그곳에 잠시 실재한 것을 증명하는 소소한 기념품 몇 개와 빨랫감이 전부였다. 여행지에서 따라붙은 먼지로 덮인 옷을 세탁기에 넣고, 먼지가 씻기는 소리를 들으며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캐리어 분실로 꿈을 꾼 흔적을 털어내는 의식이 빠졌고, 여행이란 마법에서 풀리는 시간이 유예되었다. 마법의 세계에서 영원히 떠도는 것은 아닌지, 슬그머니 조바심이 났다. 나는 마법이 풀리며 현실로 돌아오는 해피엔딩에 익숙했다. 여행은 깨어나려고 꾸는 꿈이었고, 돌아오려고 떠나는 의식이었다. ‘저기’를 갈망하는 항상성은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했다.


돌이켜보면 떠남은 마음에 안 드는 나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었고, 나에게 보내는 추앙이었다. 여행은 단단하게 뿌리 내린 생활 터전을 박차고 나갈 수 없는 나약함을 부정하는 수단이었다. 떠날 때마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를 중얼거리며 최면을 걸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넉살을 부리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았다. 익숙한 시스템에서 벗어나 하루하루 별일 없이 살아내면 조금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구경꾼이 되면 마음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생겼다. 고구마 백 개쯤 먹은 기분을 마주하고, 툭툭 털어내고 돌아왔다.      


적금 계좌에 5만 원을 매달 자동 이체하고 잊고 있으면, 어느 날 적금 만기를 알리는 문자를 받고는 기분이 좋아진다. 일 년에 한두 번 떠났던 시간은 소액 적금 같다. 떠났다 돌아온 시간이 차곡차곡 쌓였고, 생각지도 못한 이자가 붙었다.


말이 안 통하는 나라에서는 ‘배짱’과 ‘넉살’을 믿게 되었다. 계획은 틀어지기 마련이니  안달복달을 내려놓게 되었다. 여행 좀 해 본 작가들이 입 모아 말했듯이 ‘여행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는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도시의 반짝이는 보석인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며 나에게 알맞은 속도를 찾았다. 과거에 그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며 호기심을 벼리고, 일상을 살아내는 묘수를 배웠다.


이 책은 인생을 바꾼 비전 트립 이야기가 아니다. 도로시와 친구들처럼 결핍을 다른 곳에서 채우려다 제자리에 돌아온 ‘쫄보’의 잔잔바리한 이야기이다. 반복해서 떠났다가 돌아와서 일상 근육이 조금씩 단단해진 기록이다. 이 책에서 풀어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노란 벽돌길이 되길 욕심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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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2-19 23: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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